일상

조동일 『우리 학문의 길』

karmaflowing 2008. 10. 11. 20:40

p. 12-21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은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이다

  

     학문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학문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학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상식적인 질문이고, 이미 만족스러운 해답이 마련되어 있다고 여긴다면, 그런 정신상태로 학문을 할 수는 없다. 학문은 이치를 따지는 행위이고, 무엇이든지 의심스럽게 보고 다시 검토하는 데서 시작된다. 상식에 맞는 정답을 인정하지 않고 그 근거를 파헤친다. 그러므로 학문 자체에 대한 재검토는 학문 활동의 필수적인 선결 과제이다.

     학문이 무엇인가 온통 다시 문제삼지 않는다 해도, 학문을 하는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가 하는 학문의 의의와 방향에 대해서 생각하고, 실제 연구의 방법을 바로잡고자 한다. 스스로 의식하지 않더라도, 학자라면 누구나 학문론에 관한 논란에 참가하고 있다. 그런 논의를 드러내고, 모으고, 가다듬어서 학문에 대한 총괄적인 검토를 하는 것이 또한 가능하고 필요하다. 그 작업을 철저하게 해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논의가 바람직하게 활성화될 수가 있고, 그릇된 인습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학문하는 자세나 방법이 잘못되어 학문이 망쳐지고 있을 때면 학문론 전반의 반성과 방향 재정립이 절실하게 요망된다. 바로 그런 시점에서 학문을 논하고 있다.

     학문은 우선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라고 규정할 수 있다. 자명한 것 같은 이 정의에 다시 따져야 할 심각한 문제가 적지 않게 내포되어 있다.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었으면 학문에 관한 논란이 끝날 수 있겠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정의는 질문을 다시 구체화하는 단서로서 소중한 의의가 있다. 질문을 하는 방식을 따지면서 질문을 다시 해야, 동어반복에 빠지지 않고, 논의의 진전을 이룰 수 있다.

     우선 진실이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그런데 진실이 무엇인가 바로 대답하려고 서두르지 않아야, 학문 탐구를 올바르게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진실의 내용이 아닌 그 범주를 물어서, 학문의 대상인 것과 학문의 대상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진실과 그 인접 범주 사이의 관계를 따지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이처럼 이치를 따지면서 따지는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성하고 점검하는 것이 학문하는 활동의 기본 특징이다.

     진실의 인접 범주 가운데 우선 진리를 들어 논의할 필요가 있다. 학문에서 탐구하는 대상인 진실은 진리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종교적인 진리는 거기서 제외해야 한다. 검증 가능한 진리라야 학문에서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확신의 표명에 지나지 않는 신념이나 객관적인 타당성이 입증되기 어려운 이념도 학문의 소관사는 아니다. 진실은 검증 가능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사실 자체만으로는 진실이기에 부족하다. 사실은 학문을 하는 데 필요한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들의 상관관계에 어떤 원리가 있는 것을 발견해야 비로소 학문에서 탐구하는 진실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험이 많다고 해서 학문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판적인 검토를 거치지 않은 지식도 학문을 방해한다. 직접 경험한 바는 얼마 되지 않고 지식이 모자란다 해도, 필요하면 간접경험의 자료를 얼마든지 확대할 수 있다. 진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욕이 대단하고 탐구의 방법을 정확하게 익히면, 학문을 훌륭하게 할 수 있다. 기존의 지식을 믿지 않고 새롭게 탐구하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이다. 젊음이 가기 전에 돈오(頓悟)해야 평생토록 점수(漸修)할 밑천이 생긴다.

     탐구한다는 것은 아직 모르고 있던 진실을 새롭게 밝힌다는 말이다. 학문은 진실을 새롭게 밝히는 행위이므로,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는 모험을 한다. 모험에는 실패가 따르게 마련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 진실을 잘못 밝힌 과오가 발견되면 자기 스스로 다시 탐구해 시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다음 연구자가 나무라고 바로잡게 마련이다. 선행 연구의 실패는 새로운 연구를 위한 훌륭한 자극제가 되므로, 과오를 남긴 것도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을 한다면서 모험을 두려워하고, 과오를 피하려고 이미 있는 지식에 안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배신행위이다.

     새로운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세계 전체의 범위에서 하는 말이다. 학문은 온 세계 누구도 모르고 있던 진실을 밝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제조업이다. 일단 제조한 지식을 전달하고 보급하는 유통업은 학문이 아니다. 제조업을 하자면 유통업의 도움이 필요하다. 유통업의 기여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기여하는 바가 크다 하더라도 유통업을 제조업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외국 학문의 최신 동향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소개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을 학자라고 할 수는 없다. 지식의 제조업과 유통업은 서로 다른 활동이다.

     학문을 위한 경쟁에는 국내경기가 따로 없고 국제경기밖에 없다. 외국에서는 관심을 가지기 어려운 우리 국학의 연구 업적이라도 보편적인 원리 발견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따라 평가해야 마땅하다. 남들의 학설을 소개하는 데 그치고 자기 관점에서 창의적인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거나, 새로운 자료를 발견했다고 자랑하면서 자료의 의의를 논증하는 연구는 하지 않는 것은 둘 다 학문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장외경기에 지나지 않는다.

 

학문은 논리로 이루어진다

 

     학문에서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는 논리로 이루어진다.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라 하더라도 논리화되지 않은 체험에 의거하거나, 논리적 타당성이 입증되지 않은 사사로운 확신을 근거로 한다면 학문이 아니다. 예술도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의 하나라고 할 수 있으나, 논리를 필수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지는 않으므로 학문이 아니다.

     논리를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가 의심스러울 수 있다. 논리에 대한 불신을 아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익하다. 논리를 신뢰할 것인가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기본권의 하나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학문은 논리에 대한 신뢰를 자기 인생관으로 삼은 사람들이 독점해서 하는 행위이다.

     학문을 한다면서 논리를 불신하거나 논리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논리를 불신하면,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이 적절한 선택이다. 학문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학문보다 더 좋은 활동이 얼마든지 있어 학문을 낮추어 보겠다고 하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학문을 하겠다면서 학문의 기본 요건인 논리를 무시하고 논리에 어긋난 방법을 쓰겠다고 하는 내부의 변란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 폭거에 맞서서 학문을 지켜야 한다.

     교수이기는 해도 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학문을 와해시키기 위해 애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편하게 지내기 좋은 직업인 것 같아 교수가 되었는데, 교수는 누구나 논문을 써야 한다는 악법에 걸려 본의 아니게 학문을 하는 흉내는 내야 하니, 논리를 무시하고 논문을 쓰는 편법을 마련하고, 논리 자체에 대한 악담으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게 된다. 그래서 생기는 혼란을 방지하려면, 교수라는 직업이 아무 매력도 없게 하거나, 아니면 학문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교수가 되는 길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 앞의 방책을 택하면 나라가 망하고, 뒤의 방책을 택하면 학문 발전이 가속화된다.

     학문은 새로운 진실을 밝히는 모험이므로, 실패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논리를 떠난 모험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은 논리를 사용하는 모험이어야 하고, 논리의 모험이어야 한다. 논리를 준수하는 행위는 모험이 아니고 실패하지 않는다고 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논리는 타당해도 사실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면 사실에 맞는 논리를 다시 마련해야 한다. 기존의 논리 가운데 다른 것을 가져다 써야 하는 경우도 있고, 논리 자체를 새롭게 개발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학문은 논리를 사용하는 모험에 그치지 않고, 논리의 모험이기도 하다. 논리의 모험은 논리 개발을 모험의 내용으로 삼는 행위이다.

     학문은 논리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전제로 한다고 했는데, 논리에 대한 신뢰는 논리가 새롭게 개발될 수 있는 가능성 인정을 내포한다. 기존의 논리에 대한 불신 때문에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 학문 발전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기존의 논리는 불신하면서 새로운 논리를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 추구하기 때문에 논리를 혁신하는 학문 발전이 이루어진다.

     논리의 혁신은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함께 하고 있는 공통된 작업이다. 그러나 수학은 논리 자체의 혁신만 목표로 하는 점에서, 특정 대상에 관한 논리를 개발하는 데 그치는 다른 학문과 구별된다. 수학이 아닌 다른 학문에서는 수학의 논리를 가져다 쓰기도 하고 스스로 논리를 개발하기도 하면서 각기 맡고 있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시도하므로, 논리적 작업의 타당성 여부를, 대상을 근거로 해서 검증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학에서 하는 논리 자체에 관한 작업은 다루는 대상을 근거로 해서 검증할 수 없다. 논리의 유용성을 입증할 길도 없다. 수학에서 하는 학문 활동은 오직 수학 전문가들만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일반 대중에게 설명할 길은 없다. 어차피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니 아무렇게나 해도 그만이라고 한다면, 수학이 망하고, 수학에서 제공하는 논리를 이용하는 다른 학문도 일제히 망한다.

     수학자들이 자기들만 알 수 있는 작업을 엄정하게 하고, 서로 냉혹하게 평가하고, 적극 발전시켜 학문이 학문일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크게 존경할 일이다. 학문의 논리적 작업은 소홀하게 하면서 일반 대중의 이해부터 구하고, 엄격한 비판 없이 비논리와의 타협을 서슴지 않고 하는 세속적인 학문 영역의 그릇된 풍조를 나무랄 수 있는 준엄한 논거를 수학에서 갖추고 있다. 학문을 한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 활동하든지 자기 반성의 교훈을 수학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사이비 학문을 면할 수 있다.

 

학문은 실천의 지침인 이론을 마련한다

 

     학문을 해서 얻는 결과가 이론이다. 어떤 실증적인 학문이라도 논증한 사실을 종합해서 이론적인 일반화를 이룩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을 불신하고 사실 자체에 머무르고자 하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대상만 다루고 일반화를 하지 않으려 한다면 학문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막연한 가설이 이론은 아니다. 가설을 논리적으로 검증하고 사실에 의해 입증해야 비로소 이론이 된다. 사실로부터 출발하든 가설로부터 출발하든, 출발은 달라도 이론 정립에 이르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은 마찬가지이다. 사실로부터 출발하면 일반화를 위한 작업을 해야 하고, 가설에서 출발하면 사실에 의한 실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은 복잡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힘든 작업을 해야 하고, 연구비가 많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 결과 얻은 이론은 논문 형식으로 쓴 얼마 되지 않은 분량의 글에 지나지 않으며, 연구비가 많이 사용되는 분야의 논문일수록 더욱 짧아 허망하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논문으로 기술되어 있는 이론은 인류의 지혜를 자랑하는 창조물이다. 인류가 논리적인 사고로 천지만물에 관해 탐구해 얻은 성과를 더 보태서 소중하다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고의 지침으로서, 생산의 설계도로서 대단한 가치가 있다. 앞에서 학문의 논리를 불신하는 것은 자유라고 했다. 사람마다 학문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무도 학문의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론과 실천의 관계에 관해서는 해묵은 논쟁이 있어 간단하게 말하기 어렵다. 이론은 실천을 위해 소용되며, 이론의 타당성은 실천에 의해 입증된다. 그렇지만 실천이 소중한 만큼 실천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미리 점검하는 이론을 수립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이론이 없는 실천을 서두르면 착오·낭비·희생을 초래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회적인 행위에 관해서는, 이론 없는 실천이 거대한 규모의 인체실험과 다를 바 없는 위험을 수반한다. 실천에는 반드시 따르게 마련인 시행착오를 이론 차원에서 철저한 사전 검토를 해야 이를 줄일 수 있다. 이론 없이 이루어지는 실천이 실제로 얼마든지 있어,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럴수록 실천의 결과를 이론적으로 점검해서 지침이나 설계도를 다시 작성해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가장 큰 실천의 과제는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일이 엄청나게 힘들고, 잘못하면 이루 말하기 어려운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으므로, 그 과정뿐만 아니라 결과에 관해서도 사전 설계를 면밀하게 해서 철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시사해설 차원의 전망을 어려운 말로 써서 논문이라고 하거나,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 정책을 이론이라고 하는 편법에서 벗어나, 사고·사회·생명·물질에 관한 학문을 근본 이치에서부터 일제히 바로잡는 용단을 내려서 인류의 지혜를 더욱 새롭게 해야, 이념의 양극화를 넘어서는 세계사의 난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일이 어디 이치대로 되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논리적인 사고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통일처럼 불확실한 일에 관해서 논할 때에는 특히 목청을 높일 수 있다. 그래서는 혼란이 가중된다. 정신 차리지 못한 채 뜻밖의 상황에 말려들어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염려가 있다. 이치를 무시한 주장, 논리를 넘어선 억지 이념, 상대방의 손해를 곧 자기 쪽의 이익으로 삼는 놀부 심술의 정책 때문에 분단이 깊어지고 고통이 가중되었으므로, 학문의 방법으로 사전 점검하면서 통일된 조국의 바람직한 미래상의 이론적 모형을 수립해야, 역전 가능성을 찾을 수가 있다.

     통일된 조국의 기본 설계가 인류의 바람직한 미래 창조를 위한 지침으로 인정되는 보편적인 의의가 있어야, 불필요한 충돌을 줄이고, 통일 실현의 가능성을 키우는 데 구체적으로 기여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학문의 창조적인 전통을 최대한 계승해, 제1세계와 제2세계 사이의 논란을 제3세계의 관점에서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 과제이다.

 

학문은 독백이 아니고 대화이다

 

     학문은 학자 개개인이 하는 일이다. 개인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게 보장하지 않고 학문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공동연구니 집체작업이니 하는 것에 기대를 걸면 능력의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져 창조력이 감퇴되거나 이미 공인되어 있는 이론을 재확인하는 데 그칠 염려가 크다. 책임자가 잘못 선정되거나 조직이 경색되어 생기는 심각한 폐단을 막기 어렵다.

     그러나 학문은 혼자 하는 행위가 아니다. 독백이 아니고 대화이다. 개인이 연구한 업적을 토론의 대상으로 삼아 점검하고 비판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비로소 타당한 성과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반드시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절충에 의한 억지 합의는 오히려 학문의 적이다. 이론의 타당성을 논리적 파탄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고 철저하게 따지는 신랄한 토론이야말로, 타당성 점검의 기능과 새로운 창조 촉발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해서 학문 발전을 위해 불가결한 구실을 한다. 그런 토론을 계속하면서, 공동의 지침으로 삼을 만큼 확고한 연구 성과를 축적하고, 계속해서 연구해야 할 미해결의 과제를 발견하고, 연구의 방향을 다시 정하는 데 지혜를 모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어느 개인의 학문을 우리 모두의 학문으로 확대할 수 있다.

     제1세계에서 학문을 개인의 업적 경쟁으로 여겨, 각자 자기 이론을 자랑하기 위해서 남들과 다른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새롭기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폐단에서 벗어나야 한다. 제2세계에서 유일한 진리로 공인한 이념을 집단의 작업을 통해 구체화하는 데 치중하고, 근본 문제를 재검토하는 창의적인 노력을 허용하지 않는 잘못도 경계해야 한다. 그 두 가지 극단을 넘어서서 개인과 집단, 연구와 토론, 새로운 개척과 공동의 성과 축적이 서로 대등하게 살아 있는 제3의 길을 찾는 것이 긴요한 과제이다.

     학문은 독백이 아니고 대화라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학문과 교육의 관계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대학의 교육은 학문 교육이다. 학문 연구를 통해서 얻은 성과를 전달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을 토론자로 삼아 강의를 연구 발표로 진행하면서, 연구와 교육을 일치시켜야 한다. 그래야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고, 학생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길러낼 수 있다. 연구가 끝나 다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정설이라야 강의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되었다. 학문의 세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연구는 언제나 진행중에 있어 미완성이고, 역전 가능성이 있다. 학생들이 그 점을 바로 이해하고, 연구를 이어받아야 한다.

     먼 나라에서 남들이 하는 연구의 일단을 소개하는 것은 객관성을 견지하는 바람직한 태도라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연구를 바로 강의에 올리는 위태로운 짓은 삼가야 한다는 교수가 적지 않게 있어,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른다. 학문에 해를 끼치면서 학문의 전당에서 밥벌이를 한다. 학문하는 역군을 길러낼 의도가 없어, 대학생을 중고등학생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스스로 학문의 토론자임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면, 그런 교수를 일깨울 수 있고, 자기 자신이 학문의 주역으로 자라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우리 학문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 단절되고, 고립을 택하자는 것은 아니다. 조상 전래의 능력을 최대한 발전시켜야 세계적인 난문제를 감당하고 해결할 수가 있다. 학문의 주체성과 보편성을 함께 확보하고, 우리 문제를 해결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바람직하게 설계하는 데 이르러야 한다. 다음 세대는 우리 학문의 사명을 더욱 투철하게 인식하고, 한층 놀라운 성과를 이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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