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이 질문에 올바른 해답을 내릴 사람은 적으리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이 문제를 항상 생각하고 있으며, 생각하는 동안에 올바른 해답을 얻지 못한 덕분으로 편안하게 죽음의 길을 떠난다. 내가 이야기의 기술을 마쳤을 때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 자신을 '깨달은 사람'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못한다. 나는 구도의 생활, 즉 삶을 깨닫는 실험의 과정을 걸어온 사람이고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나는 별이 주는 계시나 책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나는 내 몸 속을 흐르는 피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거기에서 나는 어디서도 누구에게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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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애란 각자가 자기 자신이 지향한 바에 도달하기 위한 길,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길인 것이다. 이 길은 넓고 평탄하여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의외로 쉽게 찾아오는 수도 있겠고, 또 그와는 반대로 좁고 험악하여 가도가도 암시를 얻는 데서 그치게 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멀고도 먼 길 저쪽에 있는 자기 자신에 도달하여 완전 무결한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경우에도 불가능하며 그것이 실현된 예도 없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필생의 노력으로 분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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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미문의 새로운 것, 새로운 신을 바란다는 것은 잘못이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세계에 심어 주고 인류 앞에 새로운 신을 만들어 내놓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한 망상인 것이다. 눈을 뜬 인간, 오성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임무는 단 하나 '자기 자신'을 찾는 것, 결의를 굳히고 각오를 새롭게 하여 '자기 자신'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손으로 더듬어서라도 줄기차게 전진해 나가는 것이다. 그 밖에는 어떤 임무도 없다. 결코 없다 ―― 그 사실은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이것이 내가 이번에 체험을 통해서 얻은 성과였다.
때로 나는 여러 가지 미래도를 그려 놓고 그 환상의 세계를 거닐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내게 돌아올지도 모를 미지의 역할을 여러 가지 형태로 몽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시인이나 예언자의 역할이었는지도 모르고, 화가나, 그 밖의 역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할은 모두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나는 시를 쓰거나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한 거짓말로 설교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목표를 세운 이상, 다른 모든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역할은 다만 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참다운 역할 ―― 필생의 천직은 오직 하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 본연의 위치에 도달하는 것뿐이다.
시인으로 세상을 마치는 사람도 있겠고, 광인으로 인생의 종국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예언자로서의 직분을 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범죄자로서 일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본인에게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인간 각자의 본래의 임무는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부여된 미지의 자기 운명을 찾아내고 그 운명과 더불어 완전하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미래도피 행위의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시도는 모든 인류의 이상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 자기 본래의 임무를 망각하고 그런 행위를 시도하는 건 자기의 본심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상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무섭기도 하고 거룩하기도 한 영상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몇 번인가 예감을 느꼈고, 그 예감에 반영된 형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실지로 체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자연이라는 세계가 던진 주사위와 같은 존재였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주사위는 그대로 굴러다니다가 흙 속에 파묻혀 버릴지도 모르고, 자기 운명의 길을 찾아갈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던져진 이상에는 하나라는 숫자가 나오건 여섯이라는 숫자가 나오건 그 근원의 힘과 용기를 끌어 내어 그 의지를 자기 속으로 옮겨오는 것, 그것만이 내 천직이다. 내 본래의 임무는 그것뿐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