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나는 걷고 싶다」

karmaflowing 2010. 3. 21. 18:49

계수님께


 

작년 여름 비로 다 내렸기 때문인지 눈이 인색한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눈 뒤끝의 매서운 추위는 죄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데도 눈 한번 찐하게 안 오나, 젊은 친구들 기다려쌓더니 얼마 전 사흘 내리 눈 내리는 날 기어이 운동장 구석에 눈사람 하나 세웠습니다.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내일 모레가 2월 초하루. 눈사람도 어디론가 가고 없고 먼 데서 봄이 오는 기척이 들립니다.

1월 25일부 편지와 돈 받았습니다. 계수님의 건강과 발전을 빕니다.

 

 

1988.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