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약

흰 바람벽이 있어

karmaflowing 2010. 4. 27. 01:07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