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훈과의 대담 조 은
지난 7월 3일에 공주시에서 하는 행사 중 명사와 함께하는 토크 콘서트인 금강 달빛.별빛 이야기 행사가 열렸다. 이 날 사회를 보았는데 초대된 명사 분은 소설가 김훈 씨로서 그 분과 대담했던 내용을 적어보았다.
첫 만남 작가 김훈 씨와는 송산리 고분군 모형관에서 처음 만났다. 이 분이 예정보다 일찍 도착해서인지 시청 문화관광축제 팀장이 모시고 왔다. 시잔에서 뵈었던 대로 조금은 특이할 것 같은 인상이다. 옷차림부터가 특이하다. 방금 자전거에서 내린 듯 반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허리에는 박은 백을 둘렀다. 송산리 고분군에서는 내가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헤어지고 저녁 식사 때 다시 만났다. 즐거운 대화 후 행사장으로 출발을 하려고 하자 '옷을 가져왔는데 갈아입을까요?' 하고 내게 묻는다. 나는 그냥 가시라고 했다. 자전거 광인 그분의 모습과 지금의 복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분도 갈아입을 의사가 별로 없었는지 이내 따라 나선다.
간단한 이력 소설가 김훈은 1948년 서울 출생. 오랫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지은 책으로는 독서 에세이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선택과 옹호>, 여행 산문집 <문학기행 1,2>(공저),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 <밥벌이의 지겨움>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남한산성>, <현의 노래> 등이 있다. <칼의 노래>로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폐경>으로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공주에 오셔서 유적지를 돌아보셨는데 어느 것이 가장 인상에 남으셨나요?
공주 박물관에 있는 곰 상과 정원에 잇는 십이지상을 보았습니다. 공주에서 만난 곰 상이나 십이지상은 그 자체가 돌 속에서 튀어나오거나 드러난 것 같아요. 서양의 예술가 미켈란젤로나 로댕의 작품에서 보듯이 명작을 만들겠다는 인간의 노력이나 의도가 전혀 없어 보였지요. 공주에서 만난 곰 상은 이웃의 친근한 인간의 표정을 닮아 있었어요. 재료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요. 공주 사람들에게 아마 그런 미덕이 있겠지 싶네요.
작품에 대해 질문을 하겠는데요. 2001년도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소설 <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내용이잖아요. 당시 <칼의 노래>를 심사한 심사위원들께서 '한국 문단에 벼락처럼 내린 축복'이라는 찬사를 했고, 베스트셀러이기도 했는데요. 선생님은 도서관에서 <난중일기>를 읽고 이순신이라는 사내에 대해 언젠가는 작품을 쓸 것 같은 예감이 들었었는데 그것을 30년 후에 썼다고 하셨습니다. 칼의 노래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고려대 3학년 때 도서실에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다가 놀랐습니다. 절망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통과하는 한 인간상을 만났지요. 그 당시 영문과에서 영시를 배우고 있었는데 영시란 고귀하고 아름다운 문학이지만 배우다보니까 별로 의미가 없어지더군요. 그래서 학교도 그만 두었어요. 그리고는 군대에 갔지요 군대가 참 좋더군요. 근대가 지상낙원이라고 생각되어서 제대하기가 싫었어요. 근생활 중 젊은이의 감성에 눈을 떴지요. 자신의 정신이 커지고 언어를 장악하게 되는 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소설로 쓰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연필을 들고 소설을 썼더니 1개월 반 만에 다 써졌어요. 그냥 저절로 다 써 졌어요. 이것은 아마 마음속에 녹아 잇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나는 1948년생인데 53세 때 <칼의 노래>를 썼어요. 소설을 쓰면서 이가 여덟 개가 빠졌지요. 아무런 통증도 없이 이가 빠져요. 그냥 혓바닥에 이가 툭 떨어지곤 하더군요. 당시 동인문학상 상금이 오천만원이었는데 임플란트 값이 삼백만원이었어요. 8개가 빠졌으니까 이천사백만원인데 의사가 딱하다고 깎아줘서 이천만원에 했지요. 나머니 삼천만원은 빚 갚고, 술 먹어서 없앴어요.(웃음)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이 명랑해전에서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부순 놀라운 전과를 올리고도 숫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야기와 마지막 죽음이 자연사에 안도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전사한 것이 아닌가요?
전과에 대해 보고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요.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군인은 송로가 너무 많으면 죽게된다는 말을 했어요. 노량해전에 나가서 죽고 싶다는 말을 전날 밤 술자리에서 부하에게 했다고 해요. 그래서 자연사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전에도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우륵의 이야기를 쓴 <현의 노래>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우륵은 경상도 고령이 고향입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우륵의 터가 남아 있고, 고령군에는 야로면이 있지요. 야로라는 사람은 대장장이인데 가야와 신라의 군수물자를 동시에 만든 이중적인 사람이지요. 사람을 죽이는 군수물자를 만들고, 동시에 악기를 만들기도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우륵이 만든 가야금은 그 당시에도 완성된 악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고치게 되면 망가지게 돼요. 가야금은 우륵의 시대에 하나의 완전한 우주를 가진 완벽한 악기였어요. 우륵은 자기 조국의 운명에 대해서 어느 정도 책임 있는 입장을 가져야 할 고급관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조국 가야가 멸망하려고 하자 신라로 귀순하지요. 조국을 배반할 수도 있는 우륵이란 인간상에 관심과 매력을 느낍니다. 우륵은 조국을 배반했지만 대신 악기를 들고 신라에 들어가 가야의 악기를 살려내지요. 가야에서는 가야금의 이름이 금이었는데 통일신라 후 가야금으로 이름이 지어집니다. 가야의 악기를, 음악을 영원히 살려내고, 그것을 신라인에게 전한 우륵을 뭐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진흥왕이 이겼는지, 우륵이 이겼는지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2004년에는 소설 <화장>을 통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셨고, 소설 <언니의 폐경>으로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특히 수상작 <화장>에 대해 평론가들로부터 '한국 문학의 쾌거'라는 평과 한 명의 소설가가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하는 일은 아주 놀라운 일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평한 것을 읽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50대가 등장하고요. 특히 소설 <화장>은 암으로 죽어가는 주인공의 아내와 신입사원 '추은주'를 사랑하는 인간의 이중성 등이 전개되는데 여러가지 의미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두 소설 모두 생로병사란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썼습니다. 인간의 운명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약육강식의 운명인데 인간 전체의 운명이지요. <남한산성>이나 <칼의 노래>, <현의 노래>가 여기에 해당되지요. 소재나 내용은 다르지만 근본 구조는 불변입니다. 더러운 인간세계요. 운명이지요. 두 번째는 생로병사의 운명이지요. 개인이면 누구나 피하기 어려운 운명입니다. 실제로 어떻게 고생바다를 헤쳐 갈 것인가? 때로는 공허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이같은 인간의 피하기 어려운 운명에 대해서 쓰고 싶지만 너무 힘들고 지치는 마음입니다. 더불어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쓰고 싶습니다. 특히 젊은 여성의 아름다움은 찬란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신 작품 <남한산성>에 대해서 질문하겠는데요. 이 소설은 인조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조 임금은 공주와도 연관된 인물입니다. 1624년에 이괄의 안이 일어나자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와서 5박6일 을 머물렀거든요. 이 난이 원인이 되어 정묘호란이 일어나고, 이어서 9년 뒤인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비극이 있었는데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뒤부터 삼전도의 굴욕이 있기까지의 소설 <남한산성>이 놀라운 심리묘사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 소설은 가장 많이 팔린 작품입니다. 남한산성 때문에 남한산성 관광객이 두 배로 늘었다고 들었어요.(웃음) 이 소설 역시 약육강식에 대해서 쓴 것입니다. 야만적인 세계에서 약한 자가 어떻게 살아남느냐에 대해서 썼지요. 오늘날도 공정거래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강자와 약자의 공정거래에 대한 법이지요. 그러나 강자와 약자가 공정거래를 하면 약육강식이 됩니다. 시장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통하는 정글입니다. 제네바 협정에 보면 포로는 탈출을 도모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포로소장은 또한 총으로 탈출하는 포로를 쏠 권리도 있는 것입니다. 남한산성은 답답한 인간의 모습을 쓴 소설입니다. 그 당시 산성 안에는 쌀이나 무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만 했지요. 당면한 군사적 현실을 정확하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척화파, 주화파,로 나뉘어 말만 했어요. 나는 사람은 살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치욕과 더러움 속에서나마 살고자 했던 인조 임금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이것은 결코 잘했다고 칭찬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 선생님께서는 그 당시에 계셨다면 어떤 행동을 하셨을까요? 하고 질문을 하니) 아마도 나는 입을 딱 다물고 아무 말도 안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웃음)
소설 <공무도하가>에 대해서 징ㄹ문하겠는데요. 옛 고대시가에서 따 온 소설로 연필로만 글을 쓰시던 작가님이 특이하게도 네이버에 2009년에 연재했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어떤 내용이고, 어떤 시각으로 쓰셨는지요?
소설의 주인공이 신문기자라서 혹시 독자 가운데는 이 소설이 김훈자신의 이야기를 쓴 섯처럼 알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젊은 신문기자인데 이 소설은 부조리하고 더러운 세상을 좌충우돌하면서 살아가는 기자를 그린 작품입니다. 공무도하가는 고조선의 노래인데요. 여기가 싫으니까 고생바다 너머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다가 빠져 죽는 사람의 노래이지요
산문집 <자전거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질문하겠습니다. 선생님 자신이 소설가로 불리기보다는 자전거 레이서로 불리기를 원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왜 자전거 마니아가 되셨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자니면 좋습니다. 10년 전인 53세 때 일산으로 이사를 했는데요. 자전거만 타고 살겠다고 말했더니 아내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배달 일을 해서 돈을 벌려고 하느냐고 물어요.(웃음) 일산에서 6개월 간 타서 어느 정도 실력이 붙자 목포까지 자전거 여행을 했어요. 4박 5일이면 해결되는 거리를 9박 10일 걸렸지요. 가면서 도시에 들러 친구 만나 술 마시고 놀았기 때문입니다. 광주 친구들은 제발 서울로 돌아갈 때는 들르지 말고 그대로 통과해 달라고 농담을 하더라고요. 내 자전거는 소형 자동차 한 대 값이 나가는 고가의 자전거입니다. 그래서 이십만 원짜리를 한 대 새로 사서 그걸 타고 목포까지 갔어요. 목포에 가서는 그걸 팔았는데 중고라서 3만원을 주더군요. 판돈으로 2만원어치 술 사먹고, 1만원은 차비해서 서울로 왔는데 빈털털이지만 기분은 좋더군요. 자전거의 좋은 점은 엔진이 없다는 점입니다. 내 몸으로 바퀴를 글려서 돌려 가는 것이지요. 내 힘이 체인을 돌려서 나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퀴가 자전거 바퀴지요. 그런데 더 아름다운 바퀴는 인라인 스케이트입니다. 인라인 스케이트에는 인간의 희망이 들어 잇어요. 인간의 자랑은 직립보행인데 인라인 스케이트를 통해 미끄러져 가는 아이들을 보면 가볍고 경쾌하지요. 세상을 가볍고 경쾌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세상이 기대되는 세상입니다. 그들은 지구의 중력을 많이 벗어나서 살 것입니다. 자전거 바퀴에 희망이 있지요.
고향 서울에 대하여
나는 서울 토박이 입니다. 서울은 청게천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이 있어요. 북촌 사람들은 궁궐이 가깝기 때문에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나는 북촌 사람인데 어렸을 때 어른들은 남촌 사람들과는 놀지도 말라고 가르쳤어요.(웃음) 공산성은 북한산성보다 작지만 매우 아름다운 경관과 구조를 지닌 산성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북한산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북한산은 골세(骨勢) 바위의 세력이 하늘을 찌르는 산성입니다. 그래서 군사용으로 사용되었어요. 그런데 공산성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백제 산경문전을 보면 백제인의 산수, 풍토에 대한 감성을 읽을 수 있어요. 공주가 바로 그런 복된 고향인 것 같습니다. 현재 나의 고향인 서울엔 지방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어요. 서울 사람들은 정작 서울이란 고향에서 쫓겨나 살고 잇지요. 지방 사람들은 서울에 와서 살아도 서울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명절이면 고향으로 돌아가 서울이 텅 비지요. 그러면 나는 그제야 고향인 서울에 기요. 지방 사람들은 서울에 와서 살면서도 서울은 사람이 못 살 곳이라고 욕을 해요. 그러면서도 도대체 왜 사는 것인지. 제발 지방 사람들도 서울에 살면 서울을 고향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겟습니다. 서울은 지금 아무의 고향도 아니고 만인의 타향입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나는 뼈대만 있는 글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배웠어요. 그곳에 보면 진주성을 적에게 점령당했을 때 어떤 감정의 표현 없이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라고 써 놨어요. 군인의 문자어이지요. 소리로 치자면 동편제 같은 문장이라고 할까요.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서편제를 선호합니다. 서편제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통제됨 없이 드러나 있지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보면 100번의 군법 집행이 나옵니다. 수 많은 부하를 벌하고 베었다는 증거이지요. 그런데 부하를 죽일 때의 고통에 대해 전혀 기록하지 않았어요. 그냥 '베었다'라고만 표현하고, 희로애락을 나타내지 않았지요. <칼의 노래>에서 첫 문장을 처음엔 '꽃은 피었다'로 썼는데 3일을 고심한 끝에 '꽃이 피었다'로 고쳤어요. 그제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인생, 여자, 연애에 대하여
나는 인생을 고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희망, 행복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희망 없는 세상에서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자의 용모나 미색에 대해 입에 담기 어렵습니다. 여자는 분명 아름답지만 내 소설에 나와서 여자가 얼씬거리면 소설을 쓰기 어려워요. 그래서 일찌감치 죽어요. 이순신 장군에겐 여자가 세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일찍 죽는 것으로 썼어요. 그래야 글쓰기가 편해요. 여자는 가까이 갈 수 없는 타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남한산성>에서는 여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밤에 대해서
나는 밤을 좋아합니다. 낮에 소설 작업하고 지쳐 있다가도 밤이 되면 좋아서 어슬렁거리면서 놀고, 술도 마십니다. 낮의 하중(무게)이 빠지는 것 같은 것이 밤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헐렁해 보이고 엉성해지지요. 밤에 별이 뜨는 것도 좋아합니다. 별은 아직도 아름다운 세계(대상)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지요.
언어의 장악에 대해서
나는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를 쓴 만큼 언어를 장악하지 못한 것같다고 생각해요. 언어보다는 똑바로 보는 안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존재의 근거가 언어에 있다고 보았는데 지금은 땅바닥(현실)에 있다고 봅니다. 언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도 같습니다.
서구철학 플라톤 사상의 영향에 대해
나는 서구 철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분법적 시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진리는 아닌 것 같아요. 플라토닉 러브와 에로틱 러브의 구분 같은 것, 영혼과 육체의 구분 같은 것 말이지요. 남녀가 사랑을 하면 그들이 긍정적으로 희구하는 것은 상대방의 육체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체라고 생각하지요. 다만 정의나 평등같은 개념을 사회나 역사 속에 실현한 점은 이해합니다.
청중들의 반응
이 날은 젊은 대학생들도 많이 오핬다. 청중들은 선이 긁은 작가의 말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모두가 집중해서 들었다. 질문들도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바람에 제지를 해야 했다. 예정보다 늦게 끝났는데도 모두가 아쉬워하는 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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