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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소설가 김훈 강의

karmaflowing 2011. 7. 10. 12:48

 

[펌]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9&articleId=216851 

 

김훈의 명강의, "우리 시대의 언어는 무기를 닮았다" [3]

적군 (books****)

주소복사 조회 38 09.10.11 17:07

“나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글 쓰며 배우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나는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를 할 겁니다. 내 머릿속은 질서가 없습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질서를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선생이 아닙니다. 나는 무질서하게 이야기할 겁니다.”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입을 뗐다. 그렇게 하여 기다리던 김훈의 특강이 시작됐다. 한평생 원고지로 세상과 소통했던 소설가 김훈, <칼의 노래>, <강산무진>, <남한산성>을 거쳐 이제 막 <공무도하>를 선보인 우리시대의 대표작가, 대학교에 온 그가 들려줄 특강의 주제는 ‘말하기와 듣기’였다.

 

 

“독서의 달이라고 합니다. 독서하라는 말 많죠.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도 하고. 그런데 책 속에 길이 있나? 그렇게 생각하나? 난 없는 것 같습니다. 책에는 글자가 있습니다. 언어와 말의 구조물이 있는데 이게 길인가 하면 어렵습니다. 책 속에는 지식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길은 책 속이 아니라 일상 땅바닥에 있습니다. 그게 길입니다. 혹시 길이 책 속에 있다면, 그 길을 현실과 어찌 접목시킬 것인지, 연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겠죠. 이게 바로 책을 읽고 말 다루는 사람의 고민입니다. 그런 고민하며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듣기는 읽기와 같습니다.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말하기는 쓰기와 같습니다. 나를 세상에 표현하는 겁니다. 말하기는 듣기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 담벼락에 대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 시대에는 듣기가 없고 말하기만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청각장애자, 귀머거리의 시대입니다.”

 

 

 

“말하기는 듣기의 바탕에서 가능합니다. 듣기가 먼저고 말하기가 나중입니다. 듣기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언어의 존재 목적은 하나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소통입니다. 소통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입니다. 듣기가 없으면 소통이 안 됩니다. 읽기도 듣기와 같습니다. 남의 것을 받아들여 나를 개조하는 겁니다. 주희선생의 글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책을 읽었는데 읽기 전과 같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고 합니다. 책을 읽고 나를 개조할 수 있느냐 없느냐, 라는 기본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한 책을 읽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동양선비들은 그것을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이러면 책 읽기가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개조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 실존의 고민입니다.”

 

“우리는 토론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말 듣고 나를 개조하려는 토론을 안 합니다. 남을 개조하려고 토론합니다. 듣기는, 복잡하고도 경험하고 경건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 가능합니다. 나의 인격과 존재를 들어오는 말에 투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듣기가 쇠퇴했습니다. 언어는 불안정합니다. 나는 언어의 불안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신문, 칼럼 등에서 자기주장을 일목요연하게 할 때 반대되는 주장이 나오면, 나의 언어는 남의 언어에 의해 부정당하는 겁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이 쌓이면서 소통하는 겁니다. 언어는 돌덩이가 아닙니다. 나의 언어가 남의 언어에 의해 부서짐으로써 소통이 가능합니다. 언어는 불안정하고 허약합니다. 언어가 완연한 돌덩이라면 그건 무기입니다.

 

“요즘 우리 시대 말하기는 무기를 닮았습니다.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말할 때 구분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는 무지몽매한 언어습관이 많습니다. 사실과 의견이 뒤죽박죽입니다. 내가 사실을 말하는지, 사실을 바탕으로 의견을 말하는지, 사실과 상관없이 욕망을 말하는지 구분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기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언어가 인간과 인간의 소통에 기여하지 못합니다. 단절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일입니다.”

 

“말이 단절을 지어냅니다. 말의 목적은 소통에 있는데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지 않는 언어가 언론, 매스컴에서 매일매일 넘쳐납니다. 언론이 의견을 사실처럼 말합니다. 소통될 리가 없습니다. 나는 이런 문제에 대안이 없습니다. 다만, 그런 문제가 갖고 있는 그런 인식과 고통을 젊은 여러분과 함께 고민한다면 헛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어 비극의 바탕에는 듣기가 부재하다는 게 있습니다. 청각장애자들의 시대입니다. 언어의 순결성, 소통 능력을 회복하지 않는 한 비극이 계속 됩니다. 민주주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가능해야 합니다.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는 언어는 소통을 못합니다. 소통을 못하면 억압적인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언어라는 것이 더 이상 세력으로 존재해서는 안 되고 이성으로, 소통의 장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결한 허약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시대의 언어는 허깨비 언어입니다. 소통능력이 없습니다. 말하기와 듣기에 관한 나의 문제의식이 이렇습니다. 이 문제의식이 틀린 것이기를 바라지만, 불행히도 틀린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가 해결해야 합니다.”

 

 

청중과의 질의응답 중.
<공무도하>를 마치며 쓰신 작가의 말 중 ‘쓰기를 마치고 보니, 처음의 그 자리다’라고 하셔서 의외였습니다.
: 백수광부 이야기를 고등학교에서 배울 때 나는 무섭고 슬펐습니다. 뱃사공은 어디로 가려 한 것인가? 강의 이쪽의 현실이 견딜 수 없어서, 억압과 폭력 때문에 강을 건너려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빠져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공무도하>를 다 쓰고 보니 나도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에 빠져죽지도 못하고 여기에 머뭇거리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강 건너지 못하는 중생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사바세계에서 뒹구는,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원, 해탈 등등 좋은 글 쓰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나는 그 작가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라가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깨닫지 못했기에 중생의 언어로 쓰다가 갑니다. 부자유스럽고 매우 협소하고 영생과 구원이 없어도, 나는 여기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하신 인터뷰 중에 이 세계의 바탕은 ‘악’과 ‘폭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진보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나는 젊은이들이 ‘이념의 틀’로 세계를 들여다보는 건 지극히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은 ‘과학의 틀’로 보기를, 세계를 과학적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이념의 틀’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보니, 물론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이 세계의 바탕은 악과 폭력입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인간의 현실을 지배하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약육강식의 구조입니다. 약육강식의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대형마트가 들어오면 구멍가게들 다 문 닫습니다. 이런 일이 매일매일 일상에서 벌어집니다. 그걸 막는 제도가 있습니다. 공정거래입니다. 강자와 약자가 정당하고 똑같이 붙게 하는 겁니다. 나는 공정거래가 약육강식과 같은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진보란 뭔가? 이 약육강식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밟히면서도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가는 게 진보입니다. 구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약육강식의 구조였습니다. 앞으로는 어떨까, 글쎄, 젊은 여러분들이 해결할 몫입니다.

 

 

특강을 들어서 어땠냐고요?
김훈 작가님이 인용하신 말 중에 책을 읽기 전과 같다면 의미가 없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라면, 책을 읽은 후에 개조했다면 의미가 있다는 것일 겁니다. 이 특강은 그렇습니다. 작가님이 저를 개조했습니다. 이제 그것을 적응해지려고 합니다.

 

아주 유익했던,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특강이 또 있다면, 망설임 없이 책을 덮고, 쫓아가려고 합니다^^

 

 

p . s 들으면서 급히 메모했던 터라 ‘말’을 옳기는 과정에서 누락된 것이 있고 저도 모르게 왜곡시킨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