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드라마 <황진이> 대사

karmaflowing 2012. 7. 15. 13:40

<황진이> (2006, KBS)

 

<1회>
- 어찌 멈추느냐? 아직 춤을 맺지 못했어. 계속해 봐야지.
- 예까지밖에 보질 못했습니다.
- 보질 못했다? 허면 배워서 한 게 아니란 말이냐?
- 예. 전날 만월대에서 연희를 보았사온데, 끝까지 보질 못해서...
- 허면, 한 번 본 것을 그대로 외서 했단 말이더냐?
- 그렇습니다.
- 무엇이 느껴지더냐?
- ...
- 지금 추었던 그 춤사위라면 너에게 말을 걸었을 법도 한데? 아무것도 느껴지는 바가 없더냐?
- 슬펐... 습니다.
- 슬펐다?
- 예.
- 어찌 슬픔을 느꼈을꼬?
- 그건 잘...
- 낙화유수니라. 니가 춘 그 춤사위의 이름 말이다. 꽃잎이 물을 따라 흐른다는 말이지.
제아무리 곱다 하나 지고 만 꽃이니 니 말대로 슬플 만도 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진이, 황진이라 하옵니다.
- 진이라... 어떠냐, 그 춤을 더 배워보겠느냐?

- 배울 수 있습니까?

 

- 이게 누구야? 진이가 왔구나.
- 재주, 배우러 왔습니다. 저 교방에 들어도 좋습니까?
- 되다마다. 어서 이리, 이리 오너라.
- 안 된다! 그리 말거라! 이리 들어와서는 안 돼! 도망치거라! 어서 멀리 도망쳐!
- 어서 이리, 이리 오라니까.
- 안 된다, 그리 말거라! 그리 하면 안 돼! 도망치거라! 어서, 어서 멀리 도망쳐!
- 어서 오렴.
- 그리 하면 안 돼. 도망쳐. 이리 들어와서는 안 되느니. 어서 멀리 도망쳐!
- 별 일 아니야, 마음 쓸 것 없다. 어서 이 문턱을 넘어. 그 문턱 넘어 난 길이 바로, 교방으로 드는 길, 예인의 길이니라.
- 안 된다, 진아, 안 돼!

 

<2회>
- 됐다.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왔어. 기녀의 딸은 기녀,
- 행수 어르신!
- 그러니, 교방은 원래 니가 있어야 할 자리니라.
- 기녀의 딸?
- 안 돼요! 더는 말하지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더는.
- 뭘 하느냐? 어서 인사 여쭙지 않고? 저 이가 바로, 널 낳아준 친어미니라.
- 아니야!
- 철없이 굴지 마라, 니 딸아이가 아니냐?
- 아니야. 난 니 어미가 아니야. 그 누구의 어미도 아니라구, 난.

 

- 한 사내의 아낙이 되고 싶다는 열망은 버려라. 지고지순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감정에만 눈감을 수 있다면, 여인네의 삶 중 우리네 기녀의 삶만한 것도 없다.
학인들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학식을 갖고서야 기녀라 할 수 있으니, 그 삶의 깊이가 매우 깊다.
또한, 아름다움을 추구함에 있어 기녀만큼 자유로운 이들도 드물다.
반가의 여인네들처럼 재고 따질 것이 없고, 그 화려함으로 치자면 구중의 공주와 옹주가 부럽겠느냐.
무엇보다 구중의 공주와 옹주가 갖지 못한 것을 우리네 기녀들이 지녔으니,
그것은 바로, 재예니라.
마음을 담아 정성으로 고르는 결 고운 음률과 시퍼런 물줄기를 품은 듯 시원스레 쏟아내는 청수한 소리, 춤에 이르기까지 재예가 양식이 되는 삶,
그 삶이 풍류 속에서 늘 흥지다.
또한 재예를 닦아 최고가 되기만 한다면, 비록 신분은 천출이나 제 뜻한 바대로 한 세상 살아지는 것, 그것이 바로 기녀의 삶이니라.

 

- (울음)
- 어허, 얼마나 더 달초를 해야 그 울음 끝을 볼꼬? 석달 열흘 굶어야 정신을 차릴 게야?
- 굶다뇨? 저 죽으면 죽었지 절대 못 굶어요.
- 다음.
- 마음을 내보이지 말랬다.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놀람도 내보이지 않는 것이 기녀랬다.
기녀는 모름지기 마음을 감춤에 있어 하늘도 땅도 모르게 해야 하는 법이다. 알아들어?
- 감추고 싶지 않습니다.
- 뭐라?
- 사람이 마음을 나누지 않고 어찌 교유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 어허, 얼마나 더 달초를 당해야 정신을 차릴꼬? 마음을 내놓지 말어. 감추고 또 감춰. 그것이 기녀야.

 

- 계집에게는 그저 화조도가 제격이거늘, 어찌 그리 대만 고집할꼬? 음...
과해. 여기 든 마음이 너무 과해. 성마른 성정이 그대로 들었어. 뭣보다 그림이라는 것이 손끝 재주에 기대는 것이라던가, 어디.
마음은 과하고 재주는 아직 너무 옅어.

 

- 계집년들 앉은 모양새가 어찌 그리 풀풀댈꼬, 다시 고쳐 앉아 봐, 어디.
어허, 어디 웃전의 앞에서 뒷태를 보이려는 게냐. 조심스레 뒷걸음으로 물러섰다가, 살며시 다시 앞으로 걸어오너라.
바람 결에 꽃잎 떨어지듯 살며시 앉어. 등을 곱게 펴고, 한 무릎을 가볍게 세워.
그런 연후 두 손을 가지런히 그 위에 올려놓아라. 그것이 가장 고운 여인네의 자세니라.
- 지금의 그 무게를 잊지 말거라. 술을 따를 땐 언제나 팔에 돌을 얹은 듯 천천히 만 근의 정성을 다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 예.
- 다음.
- (황진이 손에 얹힌 돌이 떨어지고) 어허.
어찌 계집의 마음이 이리 헤프기 짝이 없을까. 술잔은 그저 과유불급이라 하질 않았더냐?
좀 부족한 듯 해야 일배 일배 부일배에 정성도 싣고 소리도 싣고 음률도 싣는다, 몇 번을 말해야 할꼬?
- 이런 걸 이리 공들여 배워야 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 뭐라?
- 받는 이에 대한 호의만 있으면 그 뿐이지, 이같은 격식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 진아.
- 이런 것들을 배우고자 교방에 든 것이 아니에요. 저 춤사위들은 다 언제 배웁니까? 악기와 소리는요.
- 몸가짐이 먼저다. 재주는 그 다음이야.
- 평생을 닦아도 최고의 경지에 가기 어려운 것이 예인의 길이라 들었습니다.
- 쓸데없는 소리. 마음을 허방에 두었으니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 알겠지. 어서!
세어라.
- (종아리) 하나! 둘! 셋! 넷!

 

- 그만!
그 멀쩡한 귀들은 다 어디에 쓰려고 달고 다닐꼬? 그저 장신구나 매달 요량인 게야?
잘 추는 춤은, 발바닥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으며, 손이 공간에서 떨어지질 않고, 정수리가 천장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언제나 천을 늘인 것 같은 몸상태를 유지하라 그리 일렀건만. 쯧쯧쯧.
다시!
음률을 타야지 어찌 엇박으로 움직이고 있누?
속내를 그리 드러내서야 쓰누? 미간에 주름잡은 것을 보니 이팔에 벌써 노파의 얼굴이 아니냐?
어허, 움직임이 어찌 이리 경망스러워. 움직임을 남용하지 말고, 이리 쩍! 하는 느낌으로 박마다 새로 추는 것이 아니라, 먼저 춘 호흡을 유지하면서 박을 먹고 지속시켜야 발바닥이 땅에서 춤을 추는 게야.
숨소리! 숨도 하나 고르지 못하고 어찌 춤을 추겠누?
남정네들 앞에서 그리 헐떡여 보라지. 아주 좋은 소일거리를 만들어 줄 게야.
- 다시 한번, 다시 한 번만 보여 주세요.
- 밤새 소경이 된 게야? 그만큼 봤으면 됐지 보긴 뭘 또 봐. 자신이 없으면 춤 배울 생각은 집어 치워.
뭘 그리 장승들처럼 서 있는 게야? 들숨과 날숨, 그리고 발느낌을 다시 익혀. 그럴 의사들이 없거든 물동이 하나씩 들고 나서.
수급비나 되라 이 말이야.

 

- 정재를 가르치시는 겝니까?
- 예.
- 뻣뻣하기가 나무토막 같다고 하셨습니까?
- 듣고 계신 줄은 몰랐구려.
- 다른 아이들은 몰라도 진이 그 아이는 그만하면 조선 제일은 아니더라도 송도 제일은 될 듯  합니다만.
- 송도 제일에 만족할 아이였다면 닦달할 연유가 없지요. 송도 제일이라구요? 조선 제일, 아니 천하 제일이 되고자 할 아입니다.
조금만 있어 보세요. 이제 내 춤의 흠을 잡고 들 테니.
내가 닦아세우지 않아도 지가 절 닦아세울 아이라 이 말이외다.
나는 그저 그 아이의 열기에 부채질이나 하는 정도라 할까. 하하하.

 

<4회>
- 허나 그보다 더 중한 것을 배웠습니다.
- 그것이 무엇이냐?
- 모아진 마음입니다. 줄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듯, 단 한 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정진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예인의 길일지도 모른다 그리 느꼈습니다, 어르신.
- 됐다, 그만 건너가 행장을 꾸리거라. 날이 밝는 대로 갈 데가 있다.

 

- 이 곳이 바로 이 나라 만인지상이신 전하께옵서 계신 궁이다. 저 문턱은 높고도 높아 신분이 비루한 자들은 감히 넘어볼 꿈도 꿀 수 없는 곳이지.
허나, 단 하나 예외가 있다. 그들이 누군지 아느냐? 궁중연희의 가무를 맡고 있는 선상기들, 바로 여악의 예기들이지.
진아,
- 예 행수 어르신
- 넌 재예에 남다른 열정을 지닌 아이다. 그 열정이 너로 하여금 송도 교방의 문턱을 썩 넘어서게 했다.
그 날을 기억하고 있느냐?
- 예
- 이제는 저 문턱을 넘어서야 한다. 벼랑 끝에 몰린 듯 줄 위에 선 듯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말고 정진하기를 게을리 마라.
그리하면 너는 거뜬히 저 문턱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 어르신, 고단해 보이십니다.
- 몸보다 마음이 더 고단하구나
- 저, 여악의 행수 어르신은 어떤 분입니까?
- 검무에 능한 이다. 검무로는 조선 최고라 할 수 있지. 또한 나의 둘도 없는 지기였느니라.
- 예?
- 어찌 그리 놀라?
- 지기라기엔 그 어르신의 적의가 너무 역력하여...
- 예인이면 누구나 갖는 맞수를 어찌 적이라 하겠느냐.
이번 경연이 잘만 끝난다면 말이다, 어쩌면 옛 친구를 만나 국선생 한 잔 서로 나눌 수도 있겠지.

진아,
- 예, 행수어르신
- 너는 기녀에게 가장 중한 벗이 누군 줄 아느냐?
- 술 입니까?
- 아니다
- 허면, 재예입니까?
- 글쎄다.
- 그도 아니면... 사랑입니까?
- 잔망스러운 것, 니가 벌써 사랑을 알어?
- 행수어르신도, 참...
- 국선생도 재예도 그리고 사랑도 기녀의 벗이긴 하나, 가장 중하다 할 수는 없다. 기녀의 가장 중한 벗은 말이다.
바로 고통이다. 고통과 벗하여 제 목숨 문턱을 썩 넘어설 수 있는 이, 그 이가 바로 진정한 기녀요, 예인이니라.

 

- 거문고를 배우겠다 했느냐?
- 그렇습니다, 어르신
- 교방에서 기녀들이 주로 다루는 악기는 가야금이다. 너 또한 수년간 배워오지 않았느냐? 헌데 그같은 가야금을 버리고 거문고를 배우겠다 하느냐?
거문고는 본시...
- 선배들이 즐겨 다루는 것이지요. 그래섭니다. 그래서 거문고를 배우고 싶습니다.
가야금은 계집을 닮은 가는 음색을 지녀 싫습니다, 어르신.
- 계집을 닮은 음색이 싫다? 계집이 저 닮은 소리가 싫어서야 쓰나
- 제가 계집으로 난 것도 싫습니다.
- 진아
- 감정 하나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고 좌지우지 되는 것이 계집의 옅은 마음이고 보면, 쓸데없는 감정을 낭비하여 예인이 되고자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을 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 진이는 교방에서 자란 동기입니다. 장차 기녀가 되겠지요. 알고 계십니까?
- 그렇..소만...
- 허면 도련님과 진이의 지체가 사뭇 다르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 ...
- 해어화,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사대부들은 기녀를 달리는 그리 부르기도 하지요.
꽃이 필요하셨습니까? 소일삼아 말벗을 삼고자 그 꽃을 따고자 하신 것이냐 여쭙고 있는 것입니다.
- 이보시오
- 한낱 노리개로 여기신 것이라면 예서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 노리개를 곁에 두실 나이는 아닌 듯 하여 여쭙는 것입니다.
- 노리개라니, 그 무슨 가당치 않은 말입니까?
- 노리개가 아니라면 진이 그 아이가 도령께 어떤 존잽니까?
- 그야... 내가 왜 그걸 댁네에게 얘길 해야 하는 겝니까?
- 어디까지 가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아일 얻기 위해 지니신 모든 것을 다 버릴 수도 있겠습니까?
- 물론이오, 물론입니다.

 

<5회>
- 네가 진이냐?
- 어머니,
- 어허
네가 진이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 그러하옵니다.
- (뺨)
- 어머니
- 너는 나서지 말어 글쎄.
천하디 천한 기생년 따위가 감히 반가의 서생을 꼬여내다니, 니가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 하느냐?
- 귀댁의 자제로부터 시를 받아 그에 화답한 바 있사오나, 그를 난행이라 여긴 바 없사옵니다.
- 허면, 니가 한 행동이 뭐라는 게야?
- 그는, 아드님께 하문하실 일이라 여겨집니다.
- 네 이년! 방자하기 짝이 없는 년, 네 기어이 물고를 내야 그 죄를 자백하겠느냐?
- 물고라니요, 지금 누굴 두고, 대체 누구시길래, 무슨 일입니까? 진아, 진이 너 거기 있니? 무슨 일이야?
- 어머니 모시고 들어가.
- 진아
- 어서!
- 어머니라? 눈먼 기녀 현금이가 니 어미라?
- 진아, 진아!
- 아 들어가요, 아주머니.
- 이거 놔라, 놓지 못해?
- 애들이 행수 어르신 부르러 갔어요, 알아서 잘 막음하실 것이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어서 들어가자구요.
- 그리는 못하네, 이거 놔, 놓지 못해? 진아
- 점입가경이로군. 어미는 육신의 눈을 잃고, 딸년은 마음의 눈을 잃었군 그래.
- 이 문젠 어미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옵니다. 어미를 모욕하는 말씀 삼가해 주십시오.
- 닥치지 못할까, 천한 것이 어디 상전을 능멸하려 드는 게야? 방자하기 짝이 없는 것 같으니라고. 용서치 않을 것이야. 내 너를 기필코 옥방에 처넣고 말 것이다.
- 그만, 그만하세요, 어머니. 저에요. 제가 했어요. 어머니가 천하다 하신 저 이에게 마음을 구걸한 것이 저라구요, 그러니...
- 정신 나갔구나, 돌았어, 돌아도 단단히 돈 게야. 대체 저 년이 널 어찌 꼬였기에 자로 잰 듯 반듯한 아이가 백주에 어미에게 덤벼들어 이런 행패를 부린단 말이냐
- 어머니, 제발 돌아가요
- 은호, 네 이녀석
- (뜨거운 물)
- (백무가 황진이를 껴안아 막음)
- (백무, 무릎꿇고) 용서합시오 마님, 귀한 댁의 진노를 샀으니 걸레같은 저희가 죽어 마땅하오나, 진노를 가라앉히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 번만, 한번만 용서를 해주십시오.
- 행수 어르신, 그리 마셔요. 그리 마셔요, 행수 어르신.
- 닥치지 못할까, 뭘 잘한게 있다고 나서, 나서길.
아랫것 단속을 하지 못했으니 모조리 이 년의 잘못입니다. 한번만 기회를 주시면 잘 단속해 두겠습니다.
다시는 심기를 어지럽힐 일이 없을 것이오니...
- 이제야 말이 통하는 것을 하나 만났군.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 황송합니다, 마님.
- 널 믿어도 되겠느냐?
- 여부가 있겠습니까?
- 또 다시 이같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 땐 어찌하겠느냐?
- 하명하시면, 자진이라도 할 것입니다.
- 허면, 내 너를 믿고 이쯤에서 돌아가보도록 하지.

 

- 악공...어르신께서 고약을 들여보내셨습니다.
- 두고 나가거라.
- 저를 위해 그리 하신 것이라면 잘한 일이 아닙니다.
- 기녀에겐 얼굴이 생명이야, 나는 행수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 약을 발라드리고 싶습니다.
- 마음을 두었더냐? 첫 정인 게야? 부질 없어. 기녀에게 정분이라니, 그 정분에 마음을 담다니, 다 부질없는 짓이다.
해어화란 그저, 외운대로 노래부르고 익힌대로 춤추며, 바늘을 태산으로 부풀리고, 바다를 국선생 한 잔으로 줄이면서, 적당히 사내들의 마음을 맞춰주면 그만인 게야.
시퍼런 물줄기가 마음을 가르거든, 쏟아내. 하늘이 네게 달려들어 품으라거든, 차라리 눈을 감아라. 그게 기녀다.
- 제게 건네는 마음, 그 진심을 믿었습니다.
- 뭘 믿어? 사내의 진심을 믿었더란 말이냐? 그리 장한 진심이 어찌 에미의 호통 앞에 그리 맥없이 무너져.
믿지 마라. 사내의 진심을 믿어 무에 써. 그걸 믿느니 차라리 여름날 소나기를 믿어.

 

- 소리 내 울어. 머리 풀고 통곡을 해도 좋고. 유약하고 못나 빠지긴 했다만 그래도 첫 정은 첫정, 그 정한을 풀어내는 데 그만 공은 들여야지.
곡성으로는 풀어내고 싶지 않다는 게냐? 다른 길을 가르쳐 주랴?
(춤) 단전에 니 슬픔을 두어라. 그리고 천천히 풀어내. 애써 잊으려 할 거 없다. 깊이 숨을 들이켜 단전에 두듯 니 사랑도 그저 거기 두면 돼.
한 사내의 베필로 평생을 살 수 없는 것이 기녀의 명운, 허나, 그 사랑을 애써 거둬들일 것까진 없다.
사랑을 독하게 품고, 그를 잃은 슬픔을 웃을 때 있을 때 그때까지 춤을 추거라. 기쁨을 웃는 것은 기녀가 아니다.
쓰라림과 노여움, 그 한을 웃을 수 있을 때 그가 바로 진정한 기녀요, 예인이니라.

 

<6회>
- 백년 천년 변치 않을 약조, 그 아름다운 약조를 내 너에게 주마.
나는 말이지, 늘 그렇게 여겨 왔어. 은애하는 마음은 기쁨을 나누고자 욕심내는 것은 아닐 거라고. 그보단 아끼는 이의 슬픔 그 슬픔을 곁을 지키는 것이라.
허나, 난 그러질 못했어. 참으로 힘들고 외롭고 노여웠을 텐데.
그런데 말이지, 우리가 다시 그 모진 시각으로 돌아간대도, 어쩌면 난 그대를 또다시 혼자 두게 될지도 모르겠어.
내 어머니, 어머니도 평생 당신의 아픔을 혼자 견뎌오신 가여운 분이라, 난 그런 어머니완 맞서 싸울 수가, 아니, 싸워지지가 않아.
싸움은 가당치가 않아.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어머니를 설득하고 싶어.
- 허나, 그는...
- 쉽지 않은 일이라 하고 싶겠지. 세상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있는 거다, 그러니 접고 말자. 더는 힘겹고 노여운 시간, 견디고 싶지 않다.
허나, 난 진정의 힘을 믿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진정이라, 그리 믿고 있어.
그러니 잠시만, 잠시만 더 그대도 나를 믿고 기다려 줄 순 없겠어? 다른 이라면 몰라도 어머니라면 이해해 주실 거야, 이해하려 드실 거야.
그리고 그 연후엔 그대가 흘렸던 그 많고 많은 눈물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살갑게 닦아 주실 게야.
그러니 나를 믿고 기다려 줘.

 

- 부르셨습니까?
- 진정이냐? 그 분 진정으로 은애하는 것이냐?
힘들어지실 게다. 너를 얻고자 하신다면 그분은 너무도 힘들어지실 게야. 그 분을 위한다면 니가 마음을 내려놓아야 해. 그러는 것이 옳다.
할 수 없다는 것이냐? 기어이 그 분의 앞길에 걸림돌을 놓아야겠다는 게야?
허나 그것은 그것만은 내가 용납할 수가 없다.
이 사랑을 나누자. 내 너를 첩으로 삼아주마.
- 그럴 수가 없을 듯 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리 쉬이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지금은, 지금은 마음을 나눌 수 없어도 좋다. 그 분의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도 좋아.
허나, 장담하지 마라. 네 그 분의 마음을 가졌다 하여 아무 것도 장담하지 마. 세월 앞에 무력하지 않은 것은 없어.
세월이 가는 만큼 꼭 그만큼 세상도 변하고 또 사람도 변하는 거다. 십 년 후, 아니 오년 후만 되어도 그 분이 네게 주었던 그 장한 사랑이 어찌 될지 아무도, 아무도 몰라.
반가의 사내로 나서 그리 손발이 묶여 버리면 먹고 자는 일, 그저 살기 위해 사는 일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그리 살게 되는 것이 좋으냐, 그 분이 후회치 않으실 것이라 그리 여기느냐?
남을 탓할 줄 모르는 어진 분이니, 그저 속으로 곪고 터지고 망가져 가겠지. 그런 그 이를 평생 지켜볼 자신이 있느냐?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이를 그리 망치고도 평생을 죄의식 없이 살아낼 수 있겠느냐? 그래도 대답치 못하겠느냐?
- 제 대답은 하납니다.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8회>
-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이 바로 젊음 아닙니까? 사랑이 좋아, 목숨을 내던져도 좋다 여기는 바로 그 물색없는 시간을 세상은 젊음이라 부르지 않는지요?
영감, 저들이 저토록 간절히 바라는 사랑의 수명은 기껏해야 석달 열흘이 고작일 것입니다.
그저 제풀에 알아서 시들어 버리는 것이 사랑이라 그런 말이지요.
허나, 어느 한 쪽이 죽임을 당해, 그 사랑이 잘린다면, 그 수명은 수십년, 아니 수백년 수천년으로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고 만 사랑이 애틋하여 따라 죽기라도 한다면 그땐 어쩌시렵니까?
그리는 않더라도 무참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폐인이라도 된다면 그땐 또 어쩌시렵니까?

 

- 서운해 마셔요. 걔가 원래 꽉 막혀 놔서. 잘 아시잖아요, 그 고집. 뭐 전하실 말씀 없으세요? 지가 잘 전할 것이니까요.
- 그저, 손이라도 한 번 살뜰히 잡아 주고 싶었다. 그 손을 잡으면 잡아라도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 고생이 아무리 심해도 너끈히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여겨 왔다.
진정이 우리의 편이라면 내 반드시 그대에게 갈 것이고, 또한 그대가 내게 오는 길을 낼 것이니, 그때까지 부디 용기를 잃지 마라, 그 말이 주고 싶었다.

 

- 섬섬이의 것이냐?
- 섬섬이가 제 몸처럼 아끼던 것이라...
어르신, 사랑이 무엇입니까? 대체 무엇이기에... 차라리 사랑을 알지 못했다면 좋았습니다. 저도, 섬섬이도.
- 두려우냐? 너도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지지 말거라. 굴하지도 마. 세상이 네게 싸움을 걸거든 싸워. 고통을 견디라 하거든 이 악물고 견뎌라.
그 수고와 고통, 그 슬픔 뒤에, 그 뒤에 있는 것이 사랑이다.

 

<9회>
- 이 생이 남달리 짧았던 것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그대를 만나 마음에 담았던 시간, 그 기억이 제게 있는데 억울하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허나, 후회는, 뼈아픈 후회는 남습니다. 그대를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 세상이 친 덫을 내 손으로 거둬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그대가 나로 인해 너무 많이 울지는 않길 바랍니다. 눈물이 그대의 몫이 되길 원칠 않아요.
차라리, 내가 그대의 외로움을 울게 해 주십시오. 나는 이제, 맘 편히 그대를 지켜볼 수 있는 곳으로 가니, 내가 흘린 눈물들은 그리 버겁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그대가 살아갈 한 생이 너무 버겁지 않기를,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 첫 정이에요
- 안다
- 그리고, 마지막 정이에요. 누구에게도,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더는 마음은 주지 않아요.
-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구나. 그렇지, 그래야...
- 기녀지요. 기녀로 살어드리겠어요. 마음 주지 않고 방싯거리는 해어화로 살아드리지요.
- 날 원망해도 좋다. 허나 난 아직도 그리 한 건 잘한 일이라 여긴다.
- 어련하시겠어요. 알아요. 송도 제일의 기녀로 선상기로까지 뽑혀가 흥청으로 살면서 그야말로 흥청망청한 세월이 퍽이나 자랑스러우시겠지요.
재주 있고 낯색 반반한 년 죄다 끌어다 진창인지 시궁창인지 판단치 않고 쓸어 담아버리고 싶을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 기녀지요.
알아요, 압니다.
- 진아
- 살아드린다잖아요. 계집이 아닌 기녀로 산다잖아요. 찾아오는 남정네 막지 않고 품어주지요. 마음 없는 몸 던지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렵겠어요.
그리고 갚아주겠어요. 그 잘난 양반들, 꽉 막힌 세상에 내가 당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호되게 갚아주겠어요.
- 나쁘지 않구나, 그래, 그리 마음을 독하게 먹어라.
- 그리고, 행수 어르신께도 갚아드리겠어요. 제 사랑을 자르고 기녀로 눌러앉힌 것이 꼭 좋지만은 않으실 겝니다.

 

<10회>
- 네 년이 이 곳 송도서 아주 잘 나가는 기생년이라지? 어떠냐? 내 오늘 네 년의 점고나 한 번 받아보려는데.
- 불가합니다.
- 집 한 채를 네년 아가리에 쳐넣을 수 없다 보여서냐?
- 오늘 제가 받을 전두는 와가 두 채이옵니다, 나으리. 허나, 나리께서 그보다 더 값진 전두를 주시겠다 하시면, 선약을 파기할 수도 있지요.
- 음, 내게 그만한 전두가 있을 턱이 없지 않느냐?
- 쯧쯧쯧, 전두를 어찌 재물로만 치를 수 있단 말인가? 비루한 자 같으니라고. 가자!

 

- 함께 가세나.
- 돌아가 주시지요.
- 이보게
- 아무리 재촉하셔도 그 뜻을 이루실 수 없을 겝니다.
- 자넨, 예인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도 없나?
- 책임감이라고 하셨습니까? 양반님네들은 참으로 편리하군요. 언제는 천출이라 금수만도 못한 취급을 하시더니, 이제는 예인이라 치켜세우며 책임감을 운운하십니다, 그려.
돌아가 주시지요. 이 년 울렁증이 나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경세란 이름으로 제 뱃속 불리기에 급급한 자들이 주워입는 그 관복만 보면 토악질이 절로 납니다.
- 자네 말이 맞네. 자네가 옳아.
세상이 썩고 문드러져 양반입네 관원입네 하는 놈들은 제놈들 권세만 믿고 백성들 고혈을 쥐어짜 제 잇속 챙기기에만 급급하지.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든 말든 알 바 아니고 말이야.
허나, 조선의 소린 말일세. 백성을 지극히 아끼는 마음, 그 애민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야. 그 초심을 기억하는 자가 없어 세상이 더 썩고 문드러진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조선의 소리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네. 그를 포기하면 애민하는 마음, 그 초심이 영영 잊혀질 것이기 때문일세.
- 승산없는 싸움입니다. 조선의 예악을 폐하겠다 작심하고 눈 감고 귀막은 자에요. 그를 설득할 수 있는 소린, 세상 천지 어디에도 없습니다.
- 나는 진심의 힘을 믿네. 자네 손끝에 묻어 음률로 살아날 그 진심이 조선의 소리를 지켜줄 것이라 나는 그리 믿네.

 

- <박연폭포> 한 줄기 긴 하늘을 바위 끝에 뿜어내니 / 폭포수 백길 물 소리 우렁차구나 / 나는 물줄기 거꾸로 쏟아져 은하수 되니 / 성난 폭포 달래는가 흰 무지개 뚜렷하네
어즈러운 물 벽력 골짜기에 가득하고 / 구슬 절구에 부서진 옥 창공에 맑았으니 / 유자여, 여산 좋다 말하지 말게 / 천마가 해동에 으뜸가는 곳이니
- 유자란 날 이름이냐?
- 그리 들으셨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 네가 대 명국의 여산을 한낱 박연에 빗대어 능멸하였으니 이는 명국을 능멸한 것이라 내 너를 꾸짖을 수도 있음이야
- 명국은 대국이 아닙니까? 작은 나라 촌기의 시 한수에 능멸을 당하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대인
- 천마는 해동의 으뜸이라 했겠다
- 제가 나고 자라 종당에 뼈를 묻을 강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신분의 고하, 남녀의 구별 없이 누구나 담고 안아야 하는 마음이 아닐런지요?
- 자부심이라.
- 산천 경계에 어찌 크고 작음이 있으며 하늘이 내린 자연이 어쩌 덜하고 더함이 있겠사옵니까?
각기 나고 자란 땅의 천지 만물에 마음을 주고 그것을 귀하다 여기고 사는 것이 사람 사는 바른 이치라 아옵니다.
- 내 일찍이 조선은 소국이라 그 문명 또한 비루하다 여겼다. 허나, 오늘 네 시가 내게 값진 가르침을 주었다.

 

<11회>
- 대인의 시는 이미 마음에 두었습니다. 하오니, 정표는 필요 없지요.
- 곁눈으로 얼핏 본 것을 그예 외워버렸다?
- 정표 따위에 기대면 마음이 옅어지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런지요? 그러니 대인께서도 마음을 두고 가십시오.
- 마음을 두고 가라?
- 시심을 나눈 벗을 아끼는 마음, 재예를 아끼는 선비의 결 고운 심성, 하여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를 지켜주겠다는 결기, 그 귀한 마음들을 두고 가십시오.
저에게도, 조선에게도.

 

- 그런데 명월이 너 말이다, 너는 어찌 춤을 추지 않은 게냐? 넘치는 재기에 그만한 시심을 가졌으면, 니 춤솜씨가 보통은 넘을 듯 한데.
- 전 춤을 추지 않습니다.
- 기녀가 되어 춤을 추지 않는다?
- 그렇습니다.
- 연유가 무엇이냐?
- 감명을 받을 만한 춤을 아직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 니 스승은 한때 조선 최고의 무기라 칭송을 받은 바도 있는 이다. 헌데 저 백무의 춤을 보고도 감명을 받지 못했다?
- 뛰어난 재주로 한때 명성을 얻은 바 있을 수도 있사오나, 그 춤엔 빠진 것이 있습니다.
- 빠진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이냐?
- 당자에게 물어보시지요. 당자도 느끼지 못한다면 전 대답할 의사가 없습니다.

 

- 제조대감의 말씀대로 춤은 훌륭했습니다. 화려한 맛은 없으나, 전아하고 기품이 있었습니다.
우리 여악에 견준다 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 그래, 니 말이 맞다. 니 말이 맞어. 누가 가르친 춤인데. 천하의 백무가 가르친 춤이면 그만큼은 쓸만해야지.
허나, 빠진 게 있어.
- 빠진 게 있다니, 그게 무엇입니까?
- 미혹이지. 보는 이의 마음을 잡아채 홀리는 힘, 그게 빠졌어. 관능을 동원하든, 파격을 가하든, 춤꾼이 춤판에 섰으면 그 이목부터 잡고 봐야 하는 거야.
아무리 격식에 잘 맞춰 추면 뭐하노. 간 빠진 음식처럼 맛이 없는 것을.
쯧쯧, 도성 최고의 무기를 자처하는 년이 어찌 촌기년보다 보는 눈이 떨어져.
- 보는 눈이 높다 하여 누구나 최고의 재주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 그야 물론 그렇지, 허나 재능이 있고 무엇보다 열과 성을 다해 수련을 하는 이에겐 그보다 강력한 무기가 없어.
제 눈에 흡족한 춤을 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 아니냐?
재예의 길이란 다른 이와 싸우기에 앞서 저 자신과 하는 싸움이야. 그렇지 않으냐?

 

- 부르셨습니까?
- 그래도 고맙단 말 정도는 해두는 것이 사람된 도리겠지.
- 인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대감의 강권 때문에 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저 제 손으로 부러뜨려야 하는 이가 다른 이들 손에 부러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 (뺨) 제가 먼저 부러져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주제에 부러뜨리긴 누굴 부러뜨린다는 게야. 일이 잘못되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어.
- 두렵지 않사옵니다.
- 연유가 뭐야? 무슨 연유로 제 자신을 그리 험히 다뤄. 응석은 그쯤에서 접어. 제 자신을 해치면서 응석부리는 짓 따위, 어린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 진심이라, 진심이 전부라 믿는 얼치기가 또 있었군, 그래.

 

- 기어이 춤을 추지 않겠다? 잔말 말고 내일부터 수련에 나와
- 싫습니다.
- 춤을 모르는 기녀는 절름발이야.
- 앉은뱅이라도 괜찮아요. 난.
- 니년이 정녕!
- 목숨이라도 끊어내고 싶으신가요. 그런다고 외눈 하나 깜빡할 제가 아니지요.
- 언제까지야. 언제까지 은혼지 뭔지 그 진절머리 나는 첫정 끌어안고 가슴만 치고 있을 게야.
- 그 더러운 입으로 그 사람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아요.
- 정신차려, 현실을 똑바로 봐.
사랑이니 정분이니 그건 평생 기생년 몫이 될 수 없어. 허나, 재주는 달라. 다시 수련을 해서 학춤을 제대로 춰.
니 춤이 세상의 마음을 움직이면 무보로 정리될 게다. 물론 니 이름은 그 무보 제일 윗줄에 오르게 되겠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느냐? 살아서는 권세, 죽어서는 명예야. 예인에게 그보다 더 값진 삶이 또 어디 있겠느냐.
- 일없어. 이제 더는 당신의 광대놀음에 날 끌어들일 생각 버려요.
- 광대놀음이라니.
- 사랑도 밟고 진심도 빼버리고 재주나 부리는 게 광대놀음 아님 뭐야.
- 방자한 년!
- 그 재준 오래 갈 것 같어? 진심도 담지 않은 재주가 재주긴 한가? 진심 없는 인간은 쓰레기야. 그 재주 또한 마찬가지고.

 

- 서신 한 장으로 무얼 대단히 알 수 있다고?
- 그러게 말일세, 지가 무슨 시관이라도 된다던가?
- 글은 선비의 얼굴이야. 그러니 제대로 된 선비라면 잡글 하나를 매만지더라도 정성을 아끼지 않겠지.
그를 가늠한 연후에 교유를 결정하겠다는 뜻 아니겠는가.

 

<12회>
- 상단 사람들, 그들이 자네의 가장 귀한 손이라지?
- 무슨 말씀이십니까?
- 그들 앞에서 연희를 베풀지 못하게 했다 하여, 벽계수 그 사람을 능멸했는가? 전날 석천 대감에게 하듯 말일세.
- 같은 사대부로서 부아라도 나십니까? 자존심을 짓밟힌 듯 해서요. 그렇다 하여 남녀가 베갯머리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관여하시는 건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 진심인가? 자네가 진정 상단 짐꾼들을 가장 중한 손이라 믿느냐 묻고 있는 것일세. 어찌 대답을 못하는 겐가.
- 답을 올릴 연유를 찾질 못하겠습니다.
- 아니, 답할 자신이 없는 거겠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차지 않는 양반님네가 자네를 주석에 청하는 딱 그날마다 상단에 갔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말일세.
내 말이 틀렸는가? 못난 사람... 언제까지 자네의 그 치기 어린 행패에 선량한 사람들을 동원할 생각인가?
그것은 양반들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들을 조롱하는 것일세. 아니, 누구보다 자네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 되겠지.

 

<13회>
- 나를 그 사람이라 여기면 어떨까? 목숨과 바꿀만큼 자네를 아꼈던 그 정인이 나라, 또한 자네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동료라, 나아가 자네 춤을 보고 있는 그 모든 사람들이라, 그리 여길 순 없는가?
- 그 일을 어찌...?
- 내가 그 일을 어찌 알았는가가 그리 중요한가? 그것보다 중한 것은 춤추고 있는 자네가 하나도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닌가?
- 대감...
- 수일 간 내 자네 춤을 지켜 보았네. 이제 재주는 걱정할 것이 없겠어.
너무도 수려한 몸놀림에 꽃도 탐할만큼 잘 만들어진 웃음, 사람들이 좋은 구경거리라 박수를 칠만은 해.
허나, 감명은 줄 수가 없겠지. 전날, 자넨 백무의 춤에 뭔가가 빠져 있었다고 했었네.
그것이 혹, 감명은 아니었는가? 내 말이 크게 틀리진 않은 모양이군. 자네가 품은 분기가 뭔지, 어찌하여 그리 결기를 부리는 겐지, 나는 잘 알 수가 없네.
허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춤꾼이 기쁘게 추지 않은 춤에서는, 그 어떤 이도 감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일세.

 

<14회>
- 헌데, 어찌하여 나의 진심을 그리 왜곡한 건가?
- 대감의 그 진심에 저 반편이의 마음이 또다시 맥없이 무너지길 원치 않는 까닭입니다.
- 무슨 말인가?
- 은애하고 계십니까?
- 이 사람아
- 명월이 그 아이를 은애하고 계시지요?
- 그래도 이 사람이.
- 그럴 것입니다. 명월이 그 천치의 마음도 또한 대감의 그것과 한 치 한 푼 다를 바 없겠지요
- 어허!
- 오늘 연희가 그 연희에서 명월이 그 아이가 춘 춤이 백마디 말보다 더 확실한 증좌입니다.
- 그 춤은 간사람을 위해 춘 것일세.
- 대감에 대한 진정을 간 사람에 대한 추억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이제 그만 명월이 그 아이의 인생에서 빠져 주십시오. 대감처럼 진심을 중히 여기는 분은 절대 기녀의 사랑, 그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 이보게
- 진심없이 노리개로 여기시겠습니까? 하룻 정 나누고 다음날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갓끈 매고 돌아서는 그 길로 그 아일 잊을 수 있으신지요?
- 노리개라니. 자네도 기녀로 살면서 그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찌 그리 잔인한 말을.
- 그래서 대감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별을 가벼이 여길 줄 아는 자가 아니면 기녀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줄 수 없으면서 진심을 주는 상대가 기녀에게 얼마나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줄 아십니까?
저는 명월이 그 아이가 또다시 헛된 희망을 품고 허우적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분기와 모든 것을 잃은 결핍감을 안고 평생 살길 원합니다.
허면, 매달릴 것은 오직 재예뿐이지요. 진이 그 아인 천부의 예인, 오직 재예만을 위해 살게 해 주세요. 그것이 조선 예악의 발전을 위해서도 큰 보탬이 되질 않겠습니까?

 

- 춤추는 거, 그거 다시 춤추는 거 나쁘지 않았어. 아니, 춤추지 않고 있는 내내, 사실 나 답답하고 갈증나고 바윗돌에 꽁꽁 묶인 것처럼 죽을 것 같고 그랬다구.
그래서, 나 춤출려고 했어. 사실 맘 속으론 나, 행수가 관비 만들겠다고 설쳐도, 그 발 앞에 엎드려 빌기라도 하려고 했어. 춤추겠다고. 춤추고 싶다고.
- 얘야.
- 어머니 말대로 그 사람 내 춤 좋아했잖어. 뭣보다 마음결이 너무, 너무 고운 사람이었어, 그 이.
그런 사람 혹여 날 보고 있기라도 하면 내가 비틀어진 맘 품고 다른 사람 미워하고 악다구니 쓰는 거 보기 좋아라하지 않을까봐, 그래서 생각했어. 그래서 용서하려고도 했어.
- 그래, 차라리 그래라. 그래야 니 속도 덜 시끄러울 거야.
- 헌데, 이젠 안 돼. 이제는 정말 진짜로 용서같은 게 하고 싶지 않아졌어.
- 또, 왜? 어째서?
- 그럴 사람이 아니야.
- 진아.
- 다른 이의 진심 갖고 제 권셀 위해 장난질이나 할 사람이 아니야. 그런 사람이 못 돼.
- 너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게야?
- 백무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일 만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
- 진아.
- 첨으로 그 사람 가고, 첨으로 그런 이를 만났어. 맘 쓰는 게 어찌 그리 그 이를 닮았을까. 가끔 그런 생각도 해 봐. 그 이가 갓, 도포 입었음 그런 모양이 아니었을까.
그 맘, 갖고 논 백무가 용서가 안 돼. 것도 간 사람 일까지 동원해서. 근데, 난 정말 우습지, 어머니. 그런 백무보다 백무의 그 진저리 나는 집착보다, 더 노여운 건 그 사람이야.
부정을 안해.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 한 마디 안 해. 어른이라서 그럴까? 그렇겠지. 진심 같은 거, 그건 기녀에게 내놓는 것이 아니다, 기녀와 진심 나눠가져 좋을 게 없다. 그런 거 너무나 잘 아는 어른이야, 어른.
그게 달라, 그 사람하고, 그게 제일 많이 달라.

 

- 그리 불편한 몸으로 나를 도울 수 있겠는가?
- 대감께오서 얻고자 하는 것이 여식의 마음이 아닙니까? 어미만큼 그 마음을 잘 아는 이가 또 어딨겠습니까?
- 그럼, 자네 말을 한 번 들어보세.
- 대감께오서 타신 곡이 백파곡이라 들었습니다.
- 명월이 그 사람 또한 즐겨 타는 곡이지.
- 대연을 즐겨 쓰는 곡을 좋아하십니까?
- 호방하고 깊은 소릴 낼 수 있으니까.
- 허나, 이제부턴 대연을 주로 쓰는 곡은 모두 버리십시오, 대감.
주로, 부드러운 소리를 품은 유연을 쓰셔야 합니다.
꾸밈소리는 절대 안 됩니다. 그 어떤 변주도 넣어선 안 되지요. 설익은 솜씨로 변주를 하면 그 곡조에 흐르는 질박함을 잃게 됩니다, 대감.

 

<15회>
- 자네 필체가 맞지? 대체 무엇에 쓰고자 내 시를 이리 베껴둔 겐가?
- 그래, 내가 자네의 시를 도둑질했어. 아주 갸륵한 시들이더군. 그 계집에게 건너가는 자네 마음이 아주 갸륵해.
하나한가 모두 절창이야. 해서, 그 마음을 훔쳐서, 그 마음을 훔쳐서라도, 그 계집의 마음을 잡고 싶었어.
- 자네, 정말...
- 비웃고 싶으면 비웃어, 조롱하고 싶으면 조롱해도 좋아. 지금 나도 이런 내가 한심해서 죽을 지경이니까.
- 거짓은 힘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 진심이라고? 그 진심 타령 좀 집어치워. 역겹고 지긋지긋해. 나는 나고 자라면서 단 한 번도 그런 걸 배워본 바가 없어.
속내를 의심해라, 웃는 얼굴을 경계해라, 제일 먼저 의심해야 할 것은 가장 절친한 지기다,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지 마라.
그저 넘치는 재물과 권세로 계집도 지기도 사라, 또!
- 이보게!
- 그것이 왕실의 종친, 그 자들이 단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할 처세다.
- 재물과 권세로 산 것은 모두가 가짜일세.
- 훈계 따윈 집어치워!
- 나도 처음이야. 적당히 안고 놀다 치워버리고 싶지 않은 계집은 처음으로 만났다고. 헌데, 도무지 잡히지가 않어. 내 식으론 도무지 손아귀에 들어오질 않는다고.
- 자네의 진심을 줘. 다른 이의 마음을 빌지 말고 진짜 자네의 마음을 주라 말일세.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세.
- 그 말, 무슨 뜻인가?
-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려 주게. 품고 놀기 좋은 계집이라 여기지 말고, 한 사람의 예인으로서 아끼고 존중해 주게.
- 그 말은, 나와 명월이 사이에서 빠져 주겠다는 말인가?
- 그 사이에, 서 본 바도 없어.
마음을 다하여 아껴주되, 그 이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게. 회자정리, 헤어짐은 비단 기녀와 사내의 사이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정한 이치.
그러니, 크게, 너무 크게는 상처 받지 말라고.

 

- 잊으신 것은 없는지요? 대감의 것이 아닙니까? 아직은, 아직은 제게 올 것이 아닌 듯 싶습니다.
어서 받으시지요. 이 안에 든 마음이 너무 무거워, 들고 있기에 힘이 부칩니다, 대감.

 

- 그 시안에 든 무거운 마음이 버거워, 송도를 떠나고자 하셨습니까?
조선의 소리는 애민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다, 그 소리를 지키고 싶다.
- 이보게
- 그같이 대단한 뜻을 어찌 천한 기생년 하나로 쉬이 내려놓으려 하십니까?
그는 좋은 일이 아닙니다, 대감.
- 나는, 자네가 지척에 있는 것이 불편해. 자네에게 욕심이 나면 날수록, 그런 내가 노여워 견딜 수가 없어.
책임질 수 없는 인연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걸 너무도 잘 아는 내가 노엽고,
자네가, 책임질 수 없는 곳에 사람이라는 거, 자네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 그 모든 것이 노여워서 너무도 노여워서 견딜 수가 없어.
- 대감의 그 마음, 곧 잠잠해질 겝니다. 정분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지요. 세월이 흐르고, 우리네 몸이 죽어져 썩어지고 말면, 다 저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허나, 대감께서 품고 지켜낸 그 뜻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네가 모두 가고 난 후, 그 후까지 아주 오래오래 살아남아, 대감께서 그토록 아끼고 귀히 하는 백성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다시 도감으로 돌아가 일을 마무리 지으세요. 저는 대감께 은애하는 마음을 받고 싶은 욕심은 없습니다.
허나 대감께서 큰 뜻을 펼치고 계신 모습을 마음에 담고는 싶습니다. 그것이 제게 남은 대감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면 합니다.

 

- 어찌 멈추십니까? 새로운 춤입니다, 행수 어르신. 십수년 동안 행수 어르신을 뫼셔 왔으나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 명고무다.
- 명고무라 하셨습니까?
- 북의 울음을 깨워 세상의 울음을 잠재워 보겠다는 뜻에서 스승님과 내가 붙인 이름이다.
- 허면, 그 자동선이란 어르신께서 송도 교방 행수 어르신에게만 무보를 건넨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 허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그 땐 왜 몰랐을까? 같은 무기라도 각기 제게 어울리는 춤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하나면, 백무에게 서넛의 마음을 주는 스승이 노여웠더랬다.
- 그 춤을 더 발전시켜 세상에 내어놓을 마음은 없으십니까?
- 그저 심화를 달래고자 두드려본 게야. 몸이 너무 녹슬었어. 머리도 단단해지고 말이지.
- (무릎끓고) 제가, 제가 돕게 하여 주십시오, 행수어르신. 열과 성을 다해 보필할 것입니다.
그 춤의 일단이라도 제게 전수하여 주십시오. 무보를 완성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 그렇게, 그렇게도 명월이가 그 아이가 이기고 싶으냐?
- .....
- 내 그 심정 안다. 천재는 늘 노력하는 준재를 참으로 가슴 아프게 만드는 법이지.

 

- 어떤가?
- 단정합니다. 정돈된 마음, 대감의 성정을 그대로 닮은 시라, 그리 여겨집니다.
- 자네가 사내로 났으면 어땠을까? 허면, 우리는 평생을 지기로 곁을 지키며 살 수 있었겠지.
- 반가의 여식이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대감의 아낙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평생 곁을 지키며 운우지락에, 때로 이리 시미 놀이도 하며, 날이 가는지 해가 바뀌는지도 모른 채, 그리 한 세상 살아낼 수도 있었겠지요.
아이는, 한 서너명쯤 있었으려나.
뭘 그리 정색을 하고 보십니까? 왜요, 제가 대감의 아낙이라도 되겠다, 생떼라도 쓸까 두려우십니까?
- 남의 말을 하듯 너무 쉽게 참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구먼.
- 남의 말이니까요. 사랑에 대한 기대 같은 거, 평범한 여인네로 살 수 있는 희망 같은 거, 잊은 지 오랩니다, 대감.
아니, 처음부터 그런 꿈은 꾸는 게 아니었습니다.
- 그런 꿈을 간 사람을 상대로는, 그런 꿈을 품었었던가?
- 어린 날의 미망이었을 뿐입니다.
- 내가 대신하겠다 하면, 그 땐 어찌되는가? 내가 간 사람을 대신하여 자네에게, 여인네의 안돈한 삶을 주고 싶다, 그러니 나를 믿고...
- 그 얘긴 이미 끝난 것으로 압니다, 대감.
- 자넨 끝났을지 모르지만, 나는,
- 안 되는 일입니다. 세상이 친 벽이,
- 벽은 부서지라고 있는 게야.
- 대감.
-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진정의 힘을 믿고, 한 번, 한 번 부딪쳐라도 보면,
- 밤이 깊었습니다, 대감, 그만 쉬시지요.

- (회상) 진정이 우리의 편이라면 내 반드시 그대에게 갈 것이고, 또한 그대가 내게 올 길을 낼 것이니, 그 때까지 부디 용기를 잃지 마라.
- 또 뭔 생각을 그러고 골똘히 하세요? 또, 우리 데련님 생각하세요?
- 어찌 그리 닮았을까. 어찌 그리 일거수 일투족이 험한 세상 겁내지 않고 부딪치겠단 그 무모한 마음까지, 어찌 저리 잘도 닮았을까.
- 안 닮았어요. 하나도 안 닮았다고요.
좋은 사람한테 거짓말 하는 미친 놈이 시상에 어딨겄어요. 진심 안 주면 사람 마음 먹기 힘든 거, 그건 나 같은 종놈도 아는 것이구만요.
용기요? 것도 마찬가지지라우. 정분에 눈이 멀었는디 시상을 들었다 놨다 하고 싶지 않겄어요?
- 무슨 말을 하고 싶은겐가?
- 인제 우리 데련님 뒤에 그만 좀 숨으라고요. 솔직하니 마음을 탁 까노라 이 말이에요.
- 그 쯤 해둬.
- 예판 대감 좋아지는 것이 겁나지라. 그래 갖고 자꾸만 닮아 갖고 그러는 것이다, 그 냥반 좋은 것이 아니고, 우리 데련님 닮아 갖고.
- 그만 두지 못해?
- 닮아 갖고 헷갈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씨 맘에는 자물통을 콱 채워두고 잡은 것이 아니냐 이 말이에요, 내말이.
- 그러면, 그러면 달라지는 것이 뭔데. 그 이하고 닮아서가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이 좋아서, 그래서 이렇게 천치같이 헤매고 있는 거라 해서 달라질 게 뭐냐구.
- 아씨...
- 한 번이면 됐다.
- 예?
- 마음에 둔 이를 모진 진창에 구겨 넣는 거, 한 번이면 됐다구. 더는 할 짓이 못 돼.

 

<16회>
- 내가 뭘 잘못했나. 자넬 마음에 둔 것이 잘못인가.
다 버리겠다고 한 거, 자네를 얻기 위해, 얻을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 꿈도 신념도 접어치울 수 있다고 한 거, 그렇게 자넬 깊이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한 거, 그게 잘못인가?
- 제가 어쩌길 바라죠? 치마폭이 다 젖도록 눈물 뿌리고, 당신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아야 하나요?
- 이보게.
- 당신은, 당신들 양반들은 언제까지 사랑을 적선쯤으로 여길 거에요? 왜 당신들만 잃을 게 있다고 생각해요?
어찌하여 당신들만 잃을 게 있고, 난, 난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 명월이라 하옵니다.
- 이 사람, 아니 그리 단박에 마음을 빼앗기면 어찌하노.
- 저 아인, 꽤나 낯이 익구만. 어디선가 본 듯해. 어디서 봤을까?
- 꿈 속에서 보았겠지. 선녀가 딱 저 모양일 터이니.
- 음, 그런 게 아니래두. 그래, 맞아, 어디서 보았는가 하였더니, 저 아인 내가 아는 어떤 이와 꽤나 닮았구먼.
- 아는 이라 했는가? 그게 누군가?
- 다 지나간 일일세. 이십 년도 더 전의 일이야.
- 연주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 저런 저런, 소리를 청해 놓고 우리가 큰 무례를 범하였구만. 미안하이, 계속하게나.
- 아니, 아닐세. 연주보다는 어쩐지 자네 얘기가 더 구미가 당기는구만.
- 하오나...
- 그래, 이십년 전에 뭐?
- 내, 이 곳 송도에 머물고 있을 때 잠시 곁에 두었던 기녀의 얘길세. 잠시 정분을 나눈다는 것이 좀 지나쳤는지, 나중에는 큰 봉욕을 치를 뻔 하였지.
- 나리를 어찌 욕보이려 하였습니까?
- 됐어, 니가 마음 쓸 일 아니다. 그저 연주나 계속 하거라.
- 그 계집의 기명이 무엇인지요?
- 마음 쓸 일 없대두.
- 얘길 해 주시어요. 또 압니까? 그 얘기가 재미나면 그를 전두로 알고 이 년이 나리의 수청이라도 들어드릴지요.
- 왜, 너도 수청 한 번 들고 내 여자 다 됐으니, 평생 곁을 지키게 해 달라 떼라도 쓰려고?
- 호, 그런 일이 있었는가? 그래 자넨 어찌했는가? 천하절색 양귀비가 평생 곁을 지키겠다는데 자넨 어찌했느냐고?
- 버렸지요. 달리 방도가 있었겠습니까? 글 읽기를 빙자하여 찾았던 명산대천에서 기녀를 품고 놀다 욕정을 이기지 못해 아이까지 갖게 했으니 그 일을 감당하긴 어려웠겠지요.
- 진아.
- 아이를 없애라 하셨던가요? 그런데 말을 듣지 않던가요? 그래서 혹 독초라도 건네셨습니까?
- 너, 너는 누구야?
- 현금이, 아닙니까? 가야금 잘 타기로 소문났던 송도 관기 진현금이, 나리가 말씀하신 그 반편이 기녀가 아닙니까?
- 니가, 니가 그를 어찌?

 

- (주안상) 필요하실 듯 해서요.
- 녀석두.
- 저 이에게 어미를 만나라 하신 분이, 어르신이셨지요. 어미에게 뭐라 말하는 것이 좋을까 가르쳐도 주셨구요.
- 진아.
- 저 이를 어머니 곁에 끌어다 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니 어머니, 기뻐하잖니.
- 어르신의 마음은요?
- 난 상관없어. 이력이 나서 견딜만 하다.
- 대체, 사랑은, 어르신이 믿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 진양... 이다. 중중모리도 자진모리도 아닌 진양. 느릿해서 구슬프지만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진양 말이다.
- 어르신.
- 저마다 자진모리로 내닫는 세상에, 그런 사랑 하나쯤 있다고 해서 크게 해 될 일은 없겠지?
허나 너는, 너만은, 그런 사랑은 하지 마라. 뜻한 바대로 접을 수 있겠거든, 그 사랑을 접어. 접고, 이룰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을 잡아라.

 

- 사흘 후, 도성으로 돌아가네.
- 들었습니다.
- 더는 자네의 마음을 번다하게 하진 않을 수 있겠군.
- 대감의 마음이 먼저 정돈될 것입니다.
- 이대로 끝인가? 만족하나?
- 물론입니다, 대감.

 

- 다시 한 번, 예판 대감의 마음을 잡아보라니요?
- 오늘 벽계수 대감의 연석에 나아가 들으니, 예판 대감의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라며 농짓거리들을 주고 받더라.
- 예판 대감이 상심을 해요? 어째서요?
- 아 어째서는. 아, 명월이 그걸 손에 넣지 못해서지.
허기사, 천하의 벽계수 대감도 손에 넣지 못한 년을, 그런 샌님이 덥석 잡아 챌 리가 없지.
어찌 됐건, 연석에 모여앉은 한량들이 난리도 아니더라. 아 이번엔 지들이 한 번 도전해 본다나, 어쩐다나.
얘는. 아 일껏 저 생각해 얘기하는데 딴청은.
아, 예판 대감 댁에 기별을 해, 기별을. 실연엔 그저 정분이 약이다. 이번에 잘 위로하면,
- 아니요. 싫어요. 안해요, 난.
- 벌써 마음이 뜬 거야? 아 얼마 전까진 죽고 못 산다고 덤비더니. 그예 정이 식고 만 거야?
- 그런 거 아니에요. 평생 그렇게 깊이 마음에 둘 사낸 만날 수 없을 거야.
- 헌데?
- 그래서 냉정을 잃었었나 봐. 계집이 무턱대고 다가서려 들면 들수록 멀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 사내의 마음이라는 거, 그걸 잊을 만큼 여유가 없었어요, 나.
당분간은 명고무에만 집중할 생각이에요. 그 사람한테 먼저 조선 최고의 춤꾼으로 인정을 받고 싶어요.
그 동안, 그리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예판 대감의 외로움은 더 깊어지겠지요. 허면, 다시 시작해 볼 기회는 자연스레 주어지지 않겠어요?

 

<17회>
- 자신이 없으면 없다고 해. 춤사위가 어려워서 배울 수 없으면 없다고 정직하게 말해.
- 맞아요. 그 춤사위 죄다 너무 어려워. 어려워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요.
- 이제야 본심을 털어놓는군.
- 연유가 뭘까요? 이토록 고난도의 발사위, 무릎사위, 손사위에 팔사위를 줄줄 늘어놓는 연유 말이에요.
- 그걸 몰라서 묻는 게냐? 그토록 오랜 동안 춤을 가르쳐 놨는데 기본부터 다시 가르쳐야 하는 게야?
- 기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고 행수 어르신 아닌가요?
- 뭐야?
- 이건,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무기가 빚어 낸 쓰레기일 뿐이야.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춤을 만들기 위한 고혈 그 자체야.
- 해 봐라 어디, 이렇게 어려운데, 이렇게 힘든데, 누가 할 수 있는지 어디 볼까?
- 명월아!
- 그리 오만에 빠져 있다 보니, 가장 결정적인 것을 빠뜨렸지. 여긴 학의 모양을 가장 아름답게 본따고 싶은 춤꾼만 있을 뿐이야.
학의 마음도, 그 학이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도 다 빠지고 없다고.
- 말 안 돼. 헛소리 지껄이지 마.
- 과연 그럴까요?
곱게 날아올랐다 가볍게 내려선다.
- 학의 몸짓은 우아함이 생명이니까.
- 언제나 그럴까요?
- 학의 모양을 떠올려 봐, 이것아.
- 그는 질릴 만큼 봤어요.
- 헌데?
- 불안하다, 어쩌면 수리가 제 새끼를 채 가려는 것을 발견했을지도 모르지. 지상에 내려선다는 것이 불 속에라도 내려 앉았나, 공포와 두려움, 빠르게 날아오른다.
고통으로 날개짓이 잦아들지만, 그래도 그 학의 눈빛은 곧 정돈된다.
왜? 제 새끼의 탄생, 그 탄생에 대한 경외감, 우리네 사람의 그것과 크게 다를까?
춤은 몸으로만 추는 게 아니에요. 춤을 출 땐 광대같이 꽃같이 웃기만 해야 한다 여기는 거, 그것도 틀렸어요.
춤이 말하고자 하는 심정과 맞아 떨어지는 표정을 지어야 해.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야 진짜 춤이 되는 거라구요.
분명히 알아둬요, 재예의 목적은 말이지요.
고난도의 춤사위를 줄줄 끼고 앉아 잘난 척 하는 게 아니에요.
손끝 재주에 기대 음률을 고르지 마라, 소리는 목청이 아니라 가슴으로 울려내야 한다, 춤은 몸으로 쓰는 시다, 그 춤에 마음을 담고 또 담아라.
- 그만!
- 듣고 있기가 불편하신가요? 그렇겠지요.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신 분은 다른 그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행수 어르신이니까.
이제 당신이 평생을 끼고 뭉갠 그 무보, 그 무보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지 똑똑히 알았겠죠.
고난도의 춤사위만 줄줄 늘어놓은 채, 마음은 단 한 치도 담지 않은 빈 껍데기, 그게 바로 당신이 가진 무보의 실체야.
그러니 그 무보 당장 태워없애. 궁중 연희에서 진연을 하겠단 꿈도 치워 없애고 말이야.

 

<18회>

- 춤판에 선 춤꾼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시작한 춤을 맺어야 해.
그게 춤꾼이고 또한 예인이야!
- 됐어요, 그만해요, 그쯤 했으면 됐어요.
- 아이들을 다시 춤판에 서라 하십시오. 춤을 맺고 술 시중을 들어도 들라 하겠습니다.
- 네 년들의 비루한 춤은 필요없다니까!
- (술상 엎는다)
- 네 이년!
- 신분이 천하다 하여 그 가진 재주도 천하다 보는가!
춤은! 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행수어르신, 행수어르신! (울음)
- 그쳐라.
- 행수어르신...
- 눈물이라니 가당치가 않아. 그치고 당장 교방으로 돌아가거라.
- 싫습니다요, 행수어르신을 잡아가겠다면 저희들도 같이 옥방으로 가겠습니다요, 행수어르신.
- 그렇게 하게 해주십시오. 저희들이 뫼시겠습니다, 행수어르신.
- 물색없는 년들!
- 행수어르신!
- 그리 부르지 마라. 나는 이제 행수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 무슨 그런 말을 하십니까요, 행수어르신.
- 그저 천치라 비웃고, 침이라도 뱉어.
- 행수어르신!
- 마음을 내놓지 말랬다. 마음을 감춤에 있어 하늘도 땅도 모르게 하는 것이 기녀랬다.
슬퍼도 안으로 삭이고, 기뻐도 소리내지 말 것이며, 아무리 노여워도 그 화를 밖으로 내놓지 않는 것, 또한 그것이 기녀랬다.
이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허문 년을 어찌 기녀에 행수라 하리. 그러니 아까운 눈물들 낭비하지 말고 당장 돌아가.
- 이럴 수는 없습니다요, 행수어르신.
- 썩 물러가지 못할까! 가세!

 

- 이렇게는 못 가. 아니, 안 가. 명월이년 데려와. 내 앞에 엎어지라고 해. 첩년이 되라고 하란 말이야!
- 그만! 그만하게! 이제 더 이상 그 여자 건드리지 마라.
- 니 여자라 이건가? 그렇게 된 건가?
- 사람은 그저 사람이야. 그 누구의 소유도 노리개도 될 수 없는 거라고.
- 잘나셨구만. 아주 잘났어.
- 위악은 위선보다 나빠. 이제는 좀 솔직해져 보는 건 어떤가. 일이 이리되어 자네도 편치만은 않은 거 알아, 알고 있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면 망자의 마지막 길 배웅이라도 하게. 그래야 가책이 조금은 덜해질 걸세.

 

<19회>
- 이 밤중에 자네가 내 집엔 어인 일이야?
- 당부할 것이 있어 왔네.
- 당부라?
- 명월이 그 사람 더는 건드리지 말게.
- 이보게.
- 아니, 그 사람 앞에 얼씬도 하지 마라.
- 너무 노골적이라 생각지 않나. 그 아인 자네의 내자가 아니야. 전두만 있으면 언제든지 살 수 있는 천기야, 천기.
- 어디까지 그 사람을 망칠 요량인가. 악담을 퍼부어 진연을 망치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마음을 넉넉하게 쓰게 제발. 절친한 지기를 잃고 싶진 않네. 더는, 더는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나.
- 자네야말로 좀 솔직해져 보는 게 어떤가?
-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세상에 나고 처음으로 마음에 두고 싶은 여인네를 만났어.
곁에 둘 수 있다면, 오래오래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수백, 아니 수천 번도 생각했어.
-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는구먼.
- 허나, 그 사람은 그리 할 수, 아니 그리 해서는 안 되는 상대야. 그래서, 평생, 평생 단 한 번 품었던 마음을 접었어.
부탁일세. 난 더 이상 그 사람이 다치는 것을 원칠 않아. 정히 그 사람을 다시 찾고 싶거든, 후일을 기약하게나.
그 사람이 가진 재예를 자네의 마음을 평안케 할 욕심, 딱 그 욕심만 가질 수 있을 때 그 때 찾게나.

 

- 그대가 가는 길, 그 길에 마주 서 배웅조차 하지 못하는 나의 용렬함을 꾸짖어 주십시오.
그대의 언 손을 한 번, 한 번은 꼭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랬다면, 그 손보다 더 차가운 그대의 마음을 덥혀줄 순 있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나는 그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 손을 잡으면 한 번이라도 잡아버리면, 영영 놓고 싶지, 아니 놓을 수 없을 듯 하여.
오늘은 그대를 그저 빛나는 예인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마음을 다해 은애하고 싶은 여인네로 품어버리는 내가, 내가 참으로 원망스럽습니다.
부디 그대가 너무 많이 아프진 않길 바랍니다. 슬픔은 예인에게 가락이 되고 시가 된다는 그 험준하나 따뜻한 진실을 그대의 몫으로 하기를 바랍니다.

 

<20회>
- 검무에 명고무로도 모잘라, 쟤가 인젠 학춤까지 넘보고 있네.
- 그래야 부용이지.
-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것이 행수 어르신의 속입니다. 마음으로 그토록 저 아이를 인정하고 계시면서, 어찌 그리 야박하게 구십니까?
- 야박하다?
- 제가 행수 어르신이면 재주 저리 좋은 년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수련에 저리 열과 성을 다하면 행수 자리 열 개라도 주겠습니다.
헌데, 그 명월이 년에 빠져 이리 나 몰라라 하시니.
- 명월이한테 빠졌다, 내가?
- 아닙니까요?
- 맞어, 니 말이 맞다. 나는 예인으로서 명월이 그 아일 누구보다 아낀다. 허나, 진정 귀애하는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귀애하는 아이는, 바로 부용이 저 아이다.
- 예?
- 저게 제 앞을 가로막는 산이란 산은 다 뛰어넘어 최고봉으로 우뚝 서 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딱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는 거라면, 나는 저 아이가 한 번은 꼭 한 번이라도 모든 질곡을 뛰어넘어 최고로 우뚝 서 보는 양을 보고 싶다.
그것이 부용이와 나, 그리고 너처럼 평범한 재주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야.
- 행수 어르신...
- 그래서다. 그래서 명월이가 필요한 게야. 명월이 그 아인 말이다. 부용이가 넘어서야 할 가장 마지막 산이다.

 

- 과인이 잘못인가? 준비된 인재를 원하는 과인의 뜻이 잘못된 것인가?
-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 전임 예판 김정한이 조정에 있었다면, 오늘날 과인의 싸움이 이같이 힘에 부쳤겠는가?
- 전하.
- 과인의 곁을 지켜라, 조정을 버리지 마라, 그것이 백성을 버리지 않는 길이다, 내 그리 이르고 또 일렀건만.
몹쓸 인사 같으니.
- 전하...
- 용서할 수가 없어. 이제 더는 그 자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 (환상) 좋은 일이다. 여인네의 행복이란 다 그런 게야. 한 남자의 아낙이 되어, 그 이를 위해 밥을 지고, 아이도 낳고, 너만은 여인네로 살아라.
- 어머니가 그리 간절히 원했던, 여인네의 안돈한 삶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재예가 빠진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래서 늘 지상에 발붙이지 못하고 부유하듯 그렇게 살았던 듯 합니다.
그러나 이젠, 이젠 땅에 내려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생 예인의 길로 돌아가지 못한대도 살아낼 수 있는 길을, 그래야만 하는 연유를 찾은 듯 합니다.

 

- (김정한의 회상) 조선의 소리를 원한다.
허면 조선의 소리는, 누가 지킨단 말인가?
과인에겐 사람이 필요하다. 권력의 단맛을 아는 자들로 넘쳐나는 조정이 너무도 버겁다 하지 않았는가?
지금처럼 앞으로도 죽, 그렇게 과인의 백성을 아끼고 귀애해 줘.
- 전하, 외로우십니까? 아직도 구중에서 홀로 싸우고 계십니까? 그 곁을 지키지 못한, 소신의 불충을 용서치 마옵소서.

 

<21회>
- 거 줄려고 멫날 메칠을 허리가 휘게 일을 하셨는데, 다 되어가는 양을 보고 좋아하시긴 또 얼마나...
잘 보셔유. 뒤에 글자는 어르신께서 직접 새겨넣으신...
- (知音)

 

- 그대의 죄는 무엇인가?
- ...
- 말을 해. 그대 입으로 말을 해 보란 말이다.
- 무단으로 임지를 이탈해 관원의 책무를 방기한 죄, 관기를 데려다 내자를 삼은 죄, 군왕의 신의를 저버리고 기망한 죄.
- 잘 알고 있구만. 참으로 줄줄 잘도 외고 있어. 허면, 그대의 죄를 어찌 씻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겠구만?
- 죄를 씻을 길은 없사옵니다, 전하. 소신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 어찌하여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살 길을 알려 달라 빌지를 않는 게야!
- 죽음 외에는 소신의 죗값을 치를 길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 암. 죽여야지. 죽여줘야 되고 말고. 한 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제가 먼저 군왕을 버리겠다 한 무도한 인사를 살려둘 수는 없지.
- 전하...
- 죽여줄 것이야. 허나, 편히 죽게 놔둘 수는 없어. 고통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르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죽어가게 해 줄 것이야.

 

- 그대에게서 충절을 앗아간 천기는 어디에 있는가? 천기는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 전하.
- 천기는, 어디에 있는가?
- ...
- 사흘, 사흘을 주지. 사흘 안에 그대에게서 충절을 빼앗고 하여 종당엔 조정을 어지럽게 한 그 천기의 행방을 대라.
그리한다면 과인은 그대가 범한 지난 날의 과오를 모두 덮고 다시 그대를 중용할 것이다.
- 전하, 그는...
- 답은, 사흘 뒤에 듣겠다. 부디 과인과 나아가 그대가 목숨보다 더 중히 왔던 저 수많은 백성들을, 더는 실망시키지 말라.

 

-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대에게서 충심을 앗아간 천기는 어디에 있는가?
- ... 아뢸 수 없사옵니다, 전하.
- 끝내 천기 하나로 과인을 버리겠다는 것인가!
- 여인네 하나, 제대로 보듬지 못하는 허약한 팔로, 어찌 큰 세상을 안을 수 있겠사옵니까?
하오니, 전하께오서 소신을 먼저 버리시옵소서.
- 좋다. 그대의 뜻대로 해주지. 전 예조판서 김정한을 거열형에 처하도록 하라!

 

<22회>
- 돌아가.
- 대감.
- 돌아가래두, 글쎄!
- 대감.
- 너까지, 너같이 권세 못가져 안달하던 년까지 하루아침에 착한 얼굴로 돌변해서 이리 설쳐대는 연유가 뭐냔 말이야!
돌아가. 명월이 그 아이, 구명할 길도 없겠지만, 설령 그런 길이 있다 해두 그건 해 줄 수가 없어.
왠 줄 아나?
나까지 그 꼴로 진심 믿고 설치는 잘난 인간 행세를 하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왔던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 돼.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는 할 수 없어.
- 대감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습니다.
- 잘난 척 하지 말랬지.
- 대감의 마은 벌써 구중 깊은 곳에 당도해 있어요.
- 부용아!
- 지금, 지금 제게 하셨던 그 고백이 움직일 수 없는 증좌입니다, 대감.
그 마음에 정직해지세요. 그래야 대감께서도 진정 마음의 평안을 찾으실 겝니다.

 

- 그대가 나보다 낫다. 그대가 나보다 나아.
이십년 전 나는 권좌를 위해 내자를 버렸다. 허나 내자는 그리 박절하게 돌아선 내게 원망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저기 보이는 저 바위에 치마를, 내가 늘 곱다 하던 그 치마를 걸어 놓고 서럽게 울었을 뿐이다.
홀로 지내던 이루 셀 수 없이 그 많은 날들을 견디며 그 밤마다 흘려야했던 눈물과 한숨은 또 얼마였을까.
허나 나는 한번도, 단 한번도 그런 내자의 눈물을 살뜰히 닦아주질 못했다.
- 전하.
- 헌데, 그대는 아녀자의 몸으로 참으로 가상한 용기다. 그 어떤 사내의 의기가 그대만 하겠는가.
그대는 오늘 죽었다.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구중 심처 옥방에서 자진을 한 것으로 해두지.
- 전하.
- 또한, 예판 김정한은 옥고를 이기지 못해 기어이 명줄을 놓은 것으로 하겠다.
군왕된 자가 제 손으로 국법을 허물 수는 없는 일, 그대와 예판을 구하자면 길은 오직 이 길 뿐이다.
- 전하.
- 내 비록 내자는 지키지 못하였으나, 그대와 예판의 그 갸륵한 인연만은 지켜주고 싶다.
그러니 함께 떠나, 이번에는 깊이, 전보다 더 깊이 숨어 살거라.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그 소중한 인연을 꼭 지키거라.
- 싫습니다.
- 뭐라?
- 전하의 은혜, 하해와 같사오나, 그 같은 뜻은 받들 수 없사옵니다.
이 자리에서 자진을 하라 명하시면 거역치 않을 것입니다. 허나, 전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명을 이어가도 좋다 윤허를 하신다면, 교방으로 가겠습니다.
- 교방으로 가겠다?
- 그러하옵니다. 교방으로 돌아가 제 명운대로 기녀로 살겠습니다.
- 허면, 그대의 사랑은 이 길로 끝이다. 그를 모르진 않겠지?
-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전하

 

- 교방으로 돌아가는 길이냐?
- 그러하옵니다.
- 밤이 깊었다. 동행이 되어주랴?
- 아닙니다.
- 너만큼이나 예판 그 사람도 어려울 거다.
- 하실 수 있거든, 제가 아니라 그 분의, 예판 대감의 동행이 되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대감.

 

- 정신이 좀 드는가?
됐어. 그대로 있게.
- 내가 왜, 어찌 여기에. 설마, 명월이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 (벽계수의 설명)
- 결국, 일이 그렇게 된 건가. 다른 길은 다 버리고 교방으로 간 건가. 결국 그렇게 된 건가.
- 괜찮은가?

 

- 도성 교방이 지금 아주 난릴세, 난리야.
단정한 성정으로 치면 조선 최고랄 수 있는 예판을 삼년이나 꿰차고 산 데다, 것도 모자라 임금의 마음까지 쥐고 흔든 물건이니,
그 낯색 한 번 보자고 몰려 드는 것이야 당연지사 아닌가.
- 딴은.
- 헌데 말이야, 그리 색기가 줄줄 흐르는 년이, 어찌 삼년을 예판같이 재미없는 사내 곁에서 그리 엎어져 지냈을까?
- 예판이 사내구실 하나는 제대로 하나 보지.
- 사내 구실 제대로 했다면 전하께서 밤도망 시켜준다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할 리가 있었겠는가?
- 아 쉬이! 듣는 귀라도 있으면 어쩔려구 이 사람들이!
- 듣는다구 대순가? 조선 팔도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일세, 공공연한 비밀!

 

- 이보게. 이보게, 일서!
- ... 왔는가?
- 사흘째 등청도 하지 않고 있다면서.
- 도무지 잡히질 않아.
- 무슨 말이야?
- 아무리 사람을 보내도, 그 문 앞을 서성이며 불러도, 도무지 날 만나줄 생각조차 하질 않아.
- 전하와의 약조일세.
- 왜? 후궁이라도 삼으시겠다던가? 그러니, 옛 서방은 잊으라, 하셨다는가?
- 자넬 살리기 위해 명월이 그 아이가 한 약조야. 저와 얽혀 공연한 말거리를 만들면 자네 앞길에 걸림돌을 놓을까 저어해서 말일세.
- 뭇 사내에게 웃음 파는 게 좋아서가 아니고?
- 자네답지 않게 왜 이래 정말?
- 하, 나다운 거라? 그게 뭔데?
- 그간 내게 자네가 주워섬겼던 말들을 떠올려 봐.
취하고 싶은 계집이 아니다, 재주 좋은 예인이다. 그러니 아껴주고 존중해야 한다.
- 삼년을 같이 살았어. 이젠 내 여자라고.
- 이젠 니 여자가 아니라, 기녀야. 잘난 예인이라, 이런 말이야.
- 인정할 수 없어.
- 이 사람, 일서!
- 아니, 인정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자네 말처럼 그 여잔 예인이니까, 놔줘야 한다, 놔줄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안돼. 되지가 않는다구. 노여워. 모든 것이 노여워서 견딜 수가 없어.
- 그렇게 노엽거든, 교방으로 가. 가서 만나! 술상에 전두 던지고 니 앞에서만 재주 부리라고 해.
- 내자에게 전두 건네는 미친놈은 없어.
- 내자가 아니라 기녀야!
- 아니야!
- 정신차려! 너 같은 놈한텐 이런 거 안 어울려. 가슴에 찬물 붓고 머리만 굴려. 머리로만 생각해서 얼른 니 자리로 돌아가. 그래야 그 여자도 편해.
알아들어?

 

<23회>
- 아일 보내야 한다면, 보낼 수밖에 없다면, 여기서 보내주고 싶었습니다.
- ... 나는, 그럴 만한 자격도,
- 자책하지 마세요. 대감이 보낸 게 아니라, 그 아이가 제 스스로 간 겝니다.
착한, 너무도 착한 아이니까요.
제가 세상에 떨어진대두 어미와 아비는 함께할 수 없는 명운, 허면 그 마음들이 얼마나 고단할까, 그를 헤아릴 줄 아는 사려깊은 아입니다.
저 때문에 또다시 부모네가 무모한 마음을 품을까, 이어서는 안 될 사랑을 무리하게 이어, 꿈도 열망도 모두 접은 채, 서로의 곁에서 시들어 가고 낡아가는 것을 보며 가슴치고 살아가진 않을까, 그 또한 염려할 줄 아는 속 깊은 아이기도 하지요.
당신과 제가 온전히 좋았던 이 곳, 이 곳에서 이제 그만 아이 놔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당신은 당신의 자리에서, 전 제 자리에서, 보듬을 수 있는 이들을 살뜰히 보듬었으면 합니다.
그들 모두가 가고 없는 우리들의 아이라고 여기고 말이지요.

 

- 요즘 보면요, 행수 어르신이 여악행수가 아니라 명월이 년 몸종 같습니다요, 몸종.
- (웃음)
- 웃음이 나오십니까요, 지금?
- 그러니 어쩌겠누, 군왕에서부터 촌에서 올라온 일개 한량에 이르기까지 그저 찾는 것은 명월이 뿐인 것을.
- 수완으로 좀 조정을 해보셔요. 다른 아이들과의 형평도 생각을 하셔야지요.
날이 갈수록 맥놓고 있는 부용일 생각하셔서라도,
- 나는 그럴 뜻 없어.
- 행수 어르신.
- 예인의 세계라는 게 이런 거 몰랐어? 모 아니면 도야. 모 아니면 도.
실력 있는 년은 명성과 재물 또한 권세를 얻지만, 실력 없는 년은 그대로 도태되어 기명조차 희미해지는 것이 다반사야.
교방 밥 그리 주워 먹고도 어찌 그만한 이치를 몰라?
- 명월이만 아니면요, 우리 부용이,
- 넘어갈 수 없으면 엎어지라고 해. 그릇이 거기까지면 어쩔 수 없는 게야.

 

- 천하 제일의 명기가 왜 그 꼴로 술을 퍼?
- 그저 잠이 안 와서.
- 창창히 거느린 아랫 것들은 다 어디 두구?
- 그저 한 잔, 딱 한 잔 먹고 자려던 길이었어. 근데 여러 사람 번다할 게 뭐야.
와 앉아. 같이 하자구.
- ...
- 이 시각에 여기 왔음, 너도 나하고 같은 이유 아냐?
(술)
하아...
- 한숨은 뭐고, 그 청승은 다 뭐야? 니가 뭐가 부족해서 그리 다 죽게 생긴 얼굴 하고 이러구 있어?
- 글쎄. 왤까?
- 우리, 이거 기녀 노릇 왜 하는 걸까? 정인도 버리고, 새끼까지 가슴에 묻고 돌아왔는데, 맘 단단히 먹구, 재예의 길로 돌아온 건데, 뭘 하러 그리 했던 걸까?
- 그게 무슨 말이야?
- 나 오늘 연석에서 거문고 타다 피곤했는지, 음률을 세 번이나 놓쳤다? 근데도 그 치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대더라구.
듣는 귀도 없는 것들이 칭찬은. 그 치들, 연주는 아예 듣지 않았는지도 몰라. 그저 소문이 하도 번지르르 하니, 찬을 안하면 즈이들이 안목 없다 비웃음을 살까, 그게 두려워,
- 잘난 척 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로 찾는다, 너는.
- 부용아.
- 그게 어때서? 손바닥에 발바닥, 즈이들이 칠 수 있는 건 다 치면서 니 이름값 찬해주는 게 뭐가 어때서?
- 부용아.
- 그거 한 번 못 가져봐 안달난 년들, 이 교방 안에 셀 수도 없이 많어. 니 이름, 그 잘난 이름에 깔려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대로 압사되는 년들로 넘쳐 나는 게 바로 지금의 여악이라 이 말이야.

 

- 들지. 오랜만에 지기가 왔는데, 대접이, 너무 소홀하구만.
- 혜민서 교수라, 정이품 당상관이 종육품 교수로 떨어졌으니, 좌천도 이런 좌천이 없구만.
전하께서도 참으로 박절하시지. 단 며칠 등청치 않고 게으름을 핀 죄를 어찌 이리 과하게 물으실꼬.
- 내가 자청한 일일세. 이렇게 다시,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 사람 참, 이렇게까지 할 게 뭔가? 자신을 그리 험하게 몰아대는 것은 좋은 일이 못 돼.
- 몰아대다니, 당칠 않네. 그저 내가 있을 자리로 온 것 뿐이야. 다시 시작해야 한단 말일세.
내 섣부름으로 인해, 결국, 마음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 그 아일 좀더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곳으로 오고 싶었네.
이렇게 한다 하여, 그 아이에게 준 상처를 백분지일, 아니 만분지일도 제대로 씻어낼 수 없을 테지만 말일세.
- 명월이 소식은 좀 듣나?
- ...
- 아주 잘 살고 있어. 전보다 더 화려하고 아주 잘 나가.

 

- 메친년.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야?
수하 팽개치고 술만 푸는 년을 어찌 스승이라 하리? 행수는 재주만 뛰어난 년이 갖는 자리가 아니다, 수하를 잘 길러내고 단속을 잘 하는 것 또한 행수된 자의 중한 자질이다, 귀에 따데기가 앉어도 골백번은 더 앉도록 이르지 않았어?
- 행수라구요? 행수라 하셨습니까?
- 부용아!
- 제가 그 자리를 위해 왜 뛰어야 합니까?
- 명월이 저 아이와 진검 승부를 하겠다, 삼년을 독품고 수련해 온 너야. 그 결기 다 어디다 치워 없앤 게야?
- 독 품고 뼈갈았으면 뭐합니까?
- 행수 자리, 여악 행수 자리, 이미 결정난 거 아닙니까?
- 부용아.
- 군왕에서 그 잘난 양반님네까지, 명월이, 명월이 그 년만 저리 끼고 도는데, 제가 승부를 하겠다 나서면 뭐합니까?
웃어요. 지나던 동네 개가 웃습니다, 행수 어르신.
- 그들이 인정한 것이 뭐가 그리 중해?
- 행수 어르신.
- 니가 인정할 수 있어? 명월이 그 아이 실력이 너보다 월등해 행수 자릴 차고 앉아 있는 것이라 그리 인정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내 두말 않고 지금 이 시각이라도 명월이 그 아이에게 행수 자릴 물려주고 퇴기로 물러앉으마.
- 제가 인정치 않아도, 세상이 이미 인정을 했다니까요.
- 니가 인정치 못하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 또한 승부는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기든 지든 끝까지 싸워. 이기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져도, 싸워서 져서 정당하게 인정을 해야 그래야 너에게도 다음이 있는 게야.

 

- (황진이 회상) "무엇이 느껴지더냐? 그 춤사위라면 너에게 말을 걸었을 법도 한데.
슬펐습니다.
슬펐다? 어찌 슬픔을 느꼈을꼬?"
바로 그거야. 내가 왜, 진즉에 그를 깨닫지 못했을까?
최고의 춤은 제가 늘 춤을 추어 익숙해진 이들이나, 늘 춤을 접하여 이미 감명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춤이 아니야.

 

- 하하하, 난 또 천하 제일의 명기라고 해서 얼마나 대단한 년인가 했더니, 그저 천하 제일의 창기일 뿐이로구나.
- 스승님, 그게 무슨...
- 화담 선생님도 참, 어찌 그리 무참한 악담을.
- 더 볼 것도 없어. 그만들 가자고.

 

- 무슨 일이냐?
- 화담 선생이라 하셨습니까?
- 그렇다만은.
- 선생의 고명은 송도 시절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사옵니다.
인사 여쭙겠습니다. 명월이라 합니다.
- 자넨, 창기에 들병이야. 맞지?
- 혹자는 천하 명기라 이르기도 하옵지요.
- 천하 제일의 명기 좋아한다. 니년은 천하 제일의 창기, 천하 제일의 들병이야.
- 연유가 무엇입니까? 이 년을 그리 폄하하시는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어르신?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미 답을 저들이 다 해 줬구먼.
- 제 춤을 보고 좋아라 한 저들의 안목을 비루하다 하신 겝니까? 저들이 비록 신분이 천하다 하여 그 보는 눈마저,
- 아직 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질 못하는 모양이로구만. 누구야? 대체 누가 너같은 천치한테 천하 명기라는 가당치 않은 이름을 붙여줬어? 쯧쯧쯧.

 

<24회>
- 난데없이 그 비루한 꼴은 뭐야?
- 최고의 춤, 어떤 게 최고의 춤일까? 넌 그게 뭔지 찾았니?
- 설마 그 꼴로 나가 다시 춤을 춘 건 아니겠지?
- 어땠을 거 같어?
- 역시 그랬군. 짐작한 대로 너는 최고의 춤을 찾겠다고 저잣거리 그 비루한 춤판에 선 거야. 허나 거기 답은 없었어. 아니니?
- 어찌 그리 단정해. 그리 쉬이 단정할 수는 없어.
- 정신 차려.
- 부용아.
- 너 하고 나, 아니 조선 팔도 관아 관기들이 죄다 목숨 걸고 익히고 있는 이 재예라는 거 말이야.
이건 저잣거리에서 나뒹굴며 구저분한 일상을 이어가는 그 비루한 자들한텐 아무 쓸모도 없는 것들이야.
재예라는 게 뭐야. 따지고 보면 그건 놀이야. 재미고 여흥거리라구.
그러니까 그게 필요한 쪽은 언제나 배부르고 등따순 치들이지. 내일 뭘 먹을까 뭘 입을까로 골머리 썩는 치들한텐 필요치 않은 거라구.
- 그러니까 니 말은 뭐야. 결국 우리는 그 잘난 임금에 양반님네들 노리개 노릇이나 한다는 데 만족해야 한단 거잖아.
- 왜 그렇게 자신을 깔고 뭉개지 못해서 안달이야.
노리개는 왜 노리개야! 재예를 감상할 줄 아는 사람들한테 제대로 된 재주를 선뵈는 거, 그게 예인이란 말을 하는 거야, 난.
- 신분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다 하여, 사람의 질도 다른 건 아니야.
너하고, 나도 천출이야.
- 천출에도 급이 있는 거지. 너하고 나처럼 말이야.
- 사람의 심성엔 고하가 없어. 재예는 사람의 심성을 건드리는 거고.
군왕으로부터 천출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에게 감명을 줄 수 없는 것은 진정한 재예가 아니야.
그 어느 한쪽밖에 설득할 수 없는 자는, 반쪽짜리 예인이야. 아니, 예인이라 할 수 없어.
- 언제까지 오만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거야?
- 난 반쪽짜리론 살 수 없어.
- 헛꿈 꾸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 멍청아.
그리 세월을 낭비하다가 니 스승이 깨끗이 비워두고 간 그 무보는 언제 다 채울 거야?
더는 저자 같은 데 기웃거리면서 힘 뺄 생각 마. 구그려 교방 담장 안에 얌전히 엎어져 지금까지 익힌 춤사위들이나 하나하나 복기하며 최고의 춤을 만들라 이런 말이야.
분명히 알아둬. 나는 헛꿈을 꾸는 반편일 상대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못 돼.

 

- 최고의 춤은 여기 없어. 교방, 이 담장 안에선 절대로 만들 수 없는 거라고.

 

- 창기 노릇, 오늘로 끝입니다, 어르신.
화려한 복색에도, 제법 쓸만하다 하는 이년의 낯색에도 기대지 않고, 오직 재예로 재예만으로 승부를 보겠어요.
재주로 뭇 사람을 설득하는 예인, 진정한 예인으로 살겠습니다.
그리 살아낼 것입니다.

 

- 삽보이무, 가랑비 내리듯 사뿐히 걸어라.
비금사, 금빛 모래가 바람에 날듯 나아갔다 물러서라.
전화지, 꽃잎이 돌듯이 곱게 돌아라.
이루 다 헤아려 볼 수 없는 저 수많은 춤사위들에 자연이 준 감명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하여 저는 그 자연에 사람살이에 가장 크게 자리한 그 스승에게 예인의 길, 그 참된 길을 물었습니다.
허나, 허나 아직 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더 많은 길을 이어야 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 좋은 춤은, 박을 치지 않아도, 그 춤사위에서 음률이 절로 살아나는 법입니다.

 

- 살아는 있네. 또 저자에 가는 게냐?
- 그래야지요.
- 가서 뭐하게?
- 몰라서 하문하시는 것은 아니신 줄 압니다만,
- 그만 둬라. 나가봐야 또다시 쓰러져 업혀 오는 일 외에, 남는 게 대체 뭐야? 그러다 죽고 싶으냐?
- 길을 찾지 못하면 그 또한 나쁠 것은 없지요. 춤꾼이 춤판에서 죽어지면 그보다 더한 광영이 어딨겠습니까?
- 엄한 짓 이제 그만 집어치워! 거기 나가 백날을 춤을 춰 봤자 넌 평생 가도 전두 못 받어!
- 뭘 근거로 그리 속단하십니까?
학인으로서 어르신의 고명 익히 들은 바 있고, 뵙자니 그것이 그저 허명은 아닌 듯 합니다만, 세상사 모든 이치를 모조리 틀어쥔 듯, 그리 자만하지 마십시오.
-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야, 이 녀석아.
- 자만심이란, 그게 어디 제게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저는 그저 전두 한 푼 받지 못하고, 거리를 떠도는 일개 춤꾼인 것을요.
- 니가 추는 춤, 그 춤 자체가 자만심 덩어리야. 아니, 아니지. 거리로 굴러나온 거, 그거부터가 다 오만이야, 이 녀석아.
- 인정할 수 없습니다.
- 물론 그렇겠지. 지 잘못이 뭔지도 모르는데 인정은 어찌하고 승복은 어찌하누. 쯧쯧쯧.
그래, 멋대로 해 봐, 어디. 굶어 죽든 얼어 죽든 춤추다 쓰러져 죽든, 니 멋대로 한 번 해 보라 이 말이야!

 

- 날이 춥지? 낯빛을 보니 오늘도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로구나. 들어가 쉬어라.
- 어르신은, 아십니까? 제가 어찌 해야 되는지, 어디로 가야 한낱 노리개가 아닌 진짜 예인이 될 수 있는지, 어르신은 아시지요?
- 그걸 내가 어찌 아누? 화담정사에 구름같이 모여드는 제자들을 그리 창창히 거느린 대스승께서 그걸 모름, 누가 안답니까?
- 선생이 가르치는 자라고 누가 그래? 선생은 그저 물어보고 저도 배우는 사람이야, 이것아.
- 들어가자. 나보다 훨씬 잘난 스승 하나 뫼셔 놨으니 가서 같이 물어보자꾸나.
학인이 뭐냐, 뭐하는 사람이냐, 그걸 궁구하고 또 궁구할 때 내가 뫼셨던 스승이다.
허나, 예인이 누구냐고 묻는 네게 그게 답이 될지 어쩔지는 그는 잘 알 수가 없구나.
(국화차)
곱지?
- 향도 좋습니다, 어르신.
- 맛은 아마 더 좋을 게다.

 

- 찻물 속에서 생전처럼 다시 피어났던 국화는 어르신 뿐 아니라 제게도 귀한 스승이었습니다.
학인이 먼저 묻고 배우는 자라면, 예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진 재주를 베풀겠다는 오만은 버립니다.
재주 두고자 했던 곳, 그곳에 있는 사람살이를 먼저 보듬어 보겠습니다.
마른 꽃이 물을 머금어 생화처럼 피어나듯, 사람살이 속에 도사린 정한들이 제 안에 온전히 스며 참된 흥으로 피어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허나 꽃으로 피어나 물 속에 다향을 전한 그 차도, 마시지 않으면 의미가 없듯, 제 얻은 흥진 춤이 세상으로 스미는 그 날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 지금 돌아왔습니다. 제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니겠지요?
- 저 아이가 누군가? 설마!
- 왜 아니겠습니까? 저 아이가 바로 명월입니다, 명월이.
-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 무슨 소리야. 당장 들어가 단장하고 격식에 맞는 춤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 아니, 이대로 좋습니다. 이대로 춤판에 서겠습니다.
- 그 꼴로 춤을 추겠다는 게냐? 기생년이 거지꼴로 연희판에 서겠다?
- 그렇습니다, 어르신.
- 그만 하고 썩 들어가 단장하고 나오지 못해?
- 그렇게 해. 공든 단장에 격식에 맞는 춤복은 춤꾼의 기본이야.
- 단장이 기녀의 기본일 수는 있으나, 춤꾼의 기본, 나아가 예인의 기본이랄 수는 없지요.
- 뭐라?
- 행수 어르신께선 제게 최고의 춤을 추라 하셨습니다.
- 그랬지.
- 최고의 춤은 최고의 예인만 출 수 있는 것, 최고의 예인에게 어찌 그 껍질이 중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중한 것은 그 품은 혼과 신명, 그 신명을 온몸으로 전해 손사위, 무릎사위, 발사위로 이어져 종당엔 보는 이의 마음, 그 혼과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예인은 최고의 춤을 갖게 된다, 믿고 있습니다.
- 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야? 니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춤이라도 틀어 쥐었다는 게야, 뭐야?
- 그를 가늠하는 것은, 제 몫이 아닙니다, 어르신. 저는 한 사람의 춤꾼으로서 제 가진 흥을, 신명을 다해, 춤판에 풀어놓을 뿐이지요.
- 알았다. 무보를 가져오너라.
- 무보는 없습니다, 행수 어르신.
- 허, 경연에 참례하는 자가 무보가 없다?
- 그렇습니다.
- 허면, 니 춤의 근간이라도 대거라.
- 정재와 갖가지 교방무 중 골격을 이루는 근간이 있을 것이 아니냐?
- 그 또한 없습니다.
- 격식은 물론이거니와 전통까지 깔아뭉개겠다?
언제까지 저 방자한 년과 입씨름을 하고 있어야 합니까? 저년을 당장 대 위에서 끌어 내리세요!
- 응당 그리 해야지. 격식과 법도는 물론 전통까지 깨겠다는 년을 어찌 기녀요, 예인이라 하겠습니까?
- 당장 끌어내려 중벌로 다스리세요. 기녀의 최고 명예라 할 수 있는 여악 행수를 뽑는 경연의 장을 더럽힌 죄를 엄히 물어야 한다 이런 말입니다.
- 아니 그럴 거 없어. 일단, 일단은 니년의 그 잘난 춤을 보도록 하자.
- 행수 어르신!
- 단, 니 춤으로 격식과 전통 그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은 그 춤으로, 여기에 모인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렇게 못하면 넌 그 길로 파문이다. 조선 팔도 그 어떤 교방으로도 돌아갈 수 없으며, 재주를 절대 탐해서도 안 된다.
오직 매음굴로 기어들어가 몸 파는 창기로 사는 거다. 그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 그러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행수 어르신.
- 니 춤의 근간이 없으니 악공들이 음률을 대 줄 수도 없다. 음률 없이 춤을 춰 감명을 줘야 한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겠지?
- 알고 있습니다.
- 좋다. 허면 시작하거라.

- 내 뒤를 이을 차기 여악 행수는, 부용이로 하겠다.
불만은 없겠지?
- 물론입니다, 행수 어르신.
- 불만이 없다니, 그게 말이 돼?
- 부용아.
- 승복할 수 없습니다.
- 승복할 수가 없다?
- 제가 졌습니다.
분하긴 하나, 이 아이의 춤이 제가 춘 춤보다 훌륭했습니다.
허면, 응당 이 아이가 여악 행수가 되어야지요.
- 그래서다. 그래서 너를 여악 행수로 삼겠다는 거다.
조선 최고의 춤꾼은 그저 춤을 추며 살면 그 뿐이다. 허나, 여악 행수는 달라.
가무악에 임하는 재주꾼들을 두루 살피고, 그 재주를 알아보는 안목을 지녀야 함은 물론, 그를 독려하여 키우는 자, 그가 바로 여악 행수야.
명월이 저 아이의 뛰어난 재주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그건 누가 뭐래도 부용이 너다.
이것이 너를 여약 행수로 뽑은 첫 번째 이유다.
휘하와 후학들이 이제부터 수도 없이 너를 밟고 앞으로 갈 것이다.
허나 그를 투기하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박수를 보내고 독려할 수 있는 자, 그것이 또한 여악 행수가 가져야 할 마땅한 마음가짐이다.
부디 경쟁의 위치에 놓여 있었으나 그 재주가 귀하면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던 오늘의 그 마음, 그 마음을 잃지 마라.
허면, 너는 누가 뭐라 해도 훌륭한 여악 행수가 될 것이다.

 

- 빚을 갚으러 온 겐가? 아니면은 이제 진짜 천하 제일이 됐으니 내게 한 수 가르침을 주려고 온 겐가?
- 울러 왔습니다, 어르신. 울 자리가, 필요했습니다, 어르신.
- 그래, 울러 와야지. 울러 올만하지 그럼. 예인이란 자들이 누구냐? 지옥 불구덩을 수천번도 더 들고 나야 하는, 명운을 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플꼬. 그래, 눈물날 만하다. 세상이 다 젖도록 울고 싶을만 해.
(울음)
허나 그리 울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 또한 예인이다.
- 알고 있습니다. 저를 그리 죽을 때까지 밀고 또 밀어 세상 사람들 웃게 해 주어야 하는 이들, 그들이 또한 예인이기 때문이지요.
오늘까지만 울겠습니다. 그리고 지고만 꽃이 다시 물을 먹어 피어나듯 그렇게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하여 후일, 송도를 지나던 이가 송도에서 크게 품을 삼절이 무엇이냐 물으면,
첫째는, 다함없이 한결같은 저 박연이요, 둘째는, 사람살이 크게 보듬으라 가르침 주신 어르신, 화담선생이요, 마지막으로 저를, 그 세상에서 눈물을 웃음으로 바꿔 살기가 원이었던 저를, 저를 꼽고 싶습니다.
그리 참된 예인으로 남은 날이 얼마든 언제나 처음처럼 그렇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 저 이는 누굽니까, 행수 어르신?
- 내 절친한 지기였느니라. 내가 인정한 유일한 맞수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교방이라는 담장, 그 담장이 가두기엔, 너무 큰 예인이었다.

 

- 모두가 함께 춤출 수 있는 신명나는 세상을 꿈꿔본다.
하여 나는, 남은 날이 얼마든, 오늘처럼 늘 춤판에 설 것이다.
사람들 얼굴에 번져 가는 미소와 기쁨, 이 값진 전두가, 고통을 넘어설 힘이 되어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춤은, 춤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나지 않을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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