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황병기, 김용옥

karmaflowing 2012. 10. 27. 20:44

황병기 같은 작곡가, 음악가들은 끊임없이 문화의 이면에서 영감을 구하면서, 전통음악과 연주 실제에서 유기적으로 탄생했으면서도 21세기와 바깥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작품을 쓴다. 황병기는 거목에 돋아난 새순과 같은 존재다. 그의 음악은 가야금만의 언어로 말하면서, 동시에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제임스 볼드윈, 페트라르카가 아니라 이탈로 칼비노, 세르반테스가 아니라 파블로 네루다의 언어로 얘기한다. 황병기와 같은 이들의 창의적인 노력을 통해 전통음악은 아픈 과거의 연상을 지워버린다. 모더니티가 더 이상 서양음악의 동의어가 아니고 서양음악이 더 이상 과학과 기술의 동의어가 아니다. 그것이 '전통'이든 '바로크', '고전', '포크', '동양', '서양'이든, 오늘을 사는 작곡가가 어떤 악기로든 곡을 쓰면 그것이 바로 모더니티이며, 정신과 귀를 동시에 즐겁게 하는 황병기의 음악 속에 바로 이런 모더니티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글: 조슬린 클락(Jocelyn Clark), 하버드대학교 동양학 박사과정


비비고 튕기는 두 가지 현악기가 동서양에 다 있지만 대접이 다르다는 것은, 이들 악기 음직 특성의 어떤 면이 동서 제각각의 문화의 기초적 미적 가치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줄비빔악기에서는 연주자가 음의 길이와 세기를 내내 통제할 수 있다. 소리와 침묵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있고, 이 경계는 연주자가 좌지우지한다. 그러나 줄튕김악기에서는 최초의 음 산출만 연주자에 의해 결정되고, 그러고 나면 연주자와 그다지 상관없이 음은 남아 있다(마치 어린이가 태어나면 어머니와 딴 몸이 되는 것처럼). 음은 차츰차츰 여려지고, 근대적 전자장비의 도움 없이는 연주자가 이 음을 더 길게 끌거나 여려지는 비율을 통제할 수 없다. 소리의 끝과 침묵의 시작 사이에 뚜렷하게 지각할 수 있는 경계도 없다. 본질적으로, 소리는 침묵이 되며,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이 음원과 가까운 데 있고 다른 소음이 없는 환경이라야 평균 이하의 귀를 가진 사람이나 어수선한 환경의 경우보다 이 과정을 더 잘 따라잡을 수 있다.

영국, 기타 유럽어의 음악 사전에는 줄튕김악기의 이 소리가 침묵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 없다. '디미누엔도'나 '데크레셴도' 가지고는 부족하다. 악구 전체, 음의 연쇄, 갖가지 비율로 작아지는 경우 모두에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감쇄(decay)' - 어감이 다소 부정적이어서 썩 유쾌하지 않은 - 가 이 현상을 더 그럴싸하게 말해주지만 이 말은 최근에야 음향학과 전자공학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예술적이라기보다 공학기술적이다. 줄튕김악기 소리의 이 기초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 없다는 사실은, 서양음악에서 이러한 면에 대해 잘 정리된 개념이나 고도의 미적 가치가 그 동안 없었음을 말해 준다. 아주 가끔, 그것도 대개 비음악적 맥락에서나 종소리나 아이올리안하프의 점적 작아지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반면, 영어로는 'after-tone'쯤 도리 법한 여음('남은 소리')이 한국의 음악미학에서는 중요한 개념이고 자주 쓰인다.


소리 하나에 관심을 모으고, 여음이라는 자연적인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 여러 가지 줄튕김행위에 의해 생겨나 조금씩 변화하는 음색, 그리고 현을 지긋이 눌러줌으로써 생기는 미분음적 뉘앙스와 잔잔한 농현을 느끼고 감상하는 태도와 어울린다. 한국의 음악미학에서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 나란히 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여음이 있는 줄튕김악기의 소리는, 있기는 있으되, 한계를 아는 인간의 역할과 근본적이되 멈출 곳을 아는 자연의 역할 사이의 균형이라는 지고의 미적 이상을 충족해 준다. 


글: 황병기


<침향무>는 <가라도> 이후 6년만의 침묵을 깨고 1974년에 발표된 문제작이다. 이 곡에서 작곡가는 판이하게 새로운 음악세계에 도달했다. 즉 서역적인 것과 향토적인 것을 조화시키고,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법열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신라 불교미술의 세계를 음악에서 추구한 것이다. 침향은 인도 향기의 이름으로, 이 곡의 악제는 침향이 서린 속에서 추는 춤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곡의 음계는 불교음악인 범패에 기초를 두기 때문에 가야금의 조현이 전혀 새로우며, 연주 기교도 서역의 하프, 즉 공후를 연상시켜 주는 분산화음을 위한 새로운 것이 많다. 이 곡에서 장구는 독자적인 위치에서 단순한 반주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손가락으로 두드린다든가 채로 나무통을 때리는 등 새로운 기교로 특이한 효과를 낼 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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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의 작품은 신비로운 영감에 찬 동양화의 수채화 같다.

극도로 섬세한 주법으로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들이 음악에서 청징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 NewYork Times

나는 우리시대의 예쑬인으로서 이 땅에서 가장 존경하는 한 분을 꼽으라면 아마 황병기 선생 한 분을 꼽을지도 모른다.

황병기 선생은 내가 자라날 시절에 우리에게 꿈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그 만큼 이론과 실제가 완벽하게 구비된, 그러면서도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논리를 구사하는 인물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는 의심할 바 없는 위대한 예술인이었다.


 - 김용옥


문명을 배우되 그것이 없더라도 사는법을 배워야한다.


문명의 진화에따라서 몸의변화가 수반되는것은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변화가 없는 것이다.


어릴 때 배운 훌륭한 고전의 한 구절은 평생을 지배한다.


이 역사에서 나는 또하나의 광대가 되어 쓰러져갈 것이다.


역사는 변화하지 않는다. 역사의 이러한 양태의 변화에 우리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것이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프로정신이다.


철저하다는 말은 남을 배타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핵을 양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비판은 타의 논리의 성실함에 상응될 수 있는 자기논리의 성실함이 있을 때만 비판으로서 유효한 것이다.


인간을 가장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지조다.


자기의 깊음의 확신이 남의 얇음을 전제하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사물놀이까지도 서양에 가서 히트를 쳐야만 우리나라에서 먹혀 들어간다고 하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슨 주체를 운운하며 무슨 새로운 사관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배워왔던 인류의 역사라는 거대한 픽션이 참으로 하나의 픽션이라는 깨달음.


우리는 끝까지 쉬움이 쉬움을 밝히는 어려운 작업을 고행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 이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문화인의 어깨에 걺어져진 사명이다.


-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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