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헬렌/스코트 니어링, 류시화 역, ?조화로운 삶?[1954], 보리, 2000.
[자서전] 스콧 니어링, 김라합 역, ?스콧 니어링 자서전?[1972], 실천문학사, 2000.
[지속] 헬렌/스코트 니어링, 윤구병·이수영 역, ?조화로운 삶의 지속?[1979], 보리, 2002.
[마무리]헬렌 니어링, 이석태 역,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1992], 보리, 1997.
[시작] 엘렌 라콘테, 황의방 역, ?헬렌 니어링, 또 다른 삶의 시작?[1996], 두레, 2002.
1. 스콧 니어링에 대한 관심
“나는 인간에게 최대한 창조적이고 건설적 차원에서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협동적 사회유형을 계획하고 건설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자서전, 244].
가장 자본주의적인 나라, 미국에서 가장 비자본주의적으로 살다 간 사람이 있다. 그 이름은 스콧 니어링이다. 그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했지만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자와는 다르게 살았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돈과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했다. 그는 기초적 생산수단에 대한 국유화를 주장했지만 결코 국가의 관리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부모가 부유했고 자신 또한 돈을 벌 기회가 많았음에도 ‘부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채찍질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큰 아들마저 그러한 ‘부의 덫’에 걸렸을 때 사랑의 채찍이 담긴 편지를 쓰기도 했다.
“너는 링컨 자동차를 타고 코네티컷의 리지필드에 저택을 짓는 것을 택했다. 너는 가장 돈 많은 미국 부유층과 어울리고 있다. 이것은 네가 최근에 <라이프>지에 쓴 글처럼 거의 어쩔 수 없이 공산주의자를 탄압하고 헐뜯는 것을 뜻할 것이다.……어느 날 너는 깨어 일어나 네가 무엇을 해왔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네가 그것을 깨달아 남은 네 인생을 무언가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돌리고, 천박하며 거짓되고 파괴적인 사회 환경에서 어린 것들을 구하는 데 쓰기를 간절히 바란다.”[마무리, 159].
한마디로 그는 돈이나 권력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삶의 자율성’에 바탕한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그가 태어난 시대나 평생을 보낸 시기나 모두 미국이 제국주의적 길을 걷던 그런 때였다. 그는 그러한 시대적 조건에 그냥 적응하며 그럭저럭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살았다. 한마디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적 삶의 방식’에 대해 회의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스콧은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끝나고 한참 산업화가 전개되며 급속도로 독점화 및 제국주의화가 진행되던 1883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한 탄광도시에서 부유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일의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스콧을 보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부르주아적인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존재(Sein)가 의식에 그대로 반영되기보다는 존재를 어떻게 주체적으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그 존재의 의식(Bewusst-sein)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스콧이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던 1899년, 불어 선생님이던 그리용에게 스콧이 친근하게 다가가, 역사 시간 과제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보고서를 쓴다고 자랑스러운 투로 했더니, 선생님이 한마디로 “인간 백정이야!”라고 꾸짖는 듯 말했다. 충격을 받은 스콧이 곰곰 따지고 보니 나폴레옹의 승리와 영광, 처절한 패배 뒤엔 프랑스 민중의 엄청난 물질적, 인간적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자서전 96-7]. 이런 식으로 스콧은 하마터면 부르주아적인 의식을 획득하여 부르주아적으로 살 뻔 했지만 스스로 진리와 진실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방식으로 존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며 성장했다.
1902년엔 오늘날 경영학 분야로 이름난 워튼스쿨에 입학했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 돈벌이 경영이나 돈벌이 경제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는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곧 1903년경엔 교직을 직업으로 택하기로 결심했다. 편견과 도그마를 거부하고 부단한 실험과 탐구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려는 자세가 역력했다[자서전 95]. 그는 경제학을 집중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공공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특히 ‘분배 문제’에 대단한 열정을 쏟았다[자서전 105].
한편, 그는 미국의 중산층 이상 가정이 쉽게 찬동하는 기독교 교회는 서양 문명 전체를 통틀어 반동과 부패의 온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면서, 스콧은 세속의 거물들과 교계의 거물들이 기독교 교회를 매개로 결탁하여, 민중의 눈을 가리고 착취와 강탈을 일삼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자서전 101].
학문적 정열과 능력에 있어 두루 인정을 받은 스콧은 1905년에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강의를 시작했다. 1915까지 약 10년간 워튼 스쿨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도 스콧은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 가능한 한 지출을 최소화했고 반면, 학교 밖 수입원을 증대하려 애썼으며, 노후를 위해 조금씩 적립했다[자서전 116]. 그러나 생활이 아무리 어려워도 아부나 눈치, 윗사람에 대한 순응을 통한 승진, 안정과 특혜 같은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가 고수한 철학은 ‘가진 것이 많을수록 행복은 줄어든다.’는 것이었다[자서전 117].
일례로 그는 이미 학창 시절에 부가 가진 위험, 부의 유혹, 즉 ‘부의 덫’을 알고 있었다. 1920년대에 뉴욕의 재력가인 헤리어트 플래그가 스콧에게 엄청난 유산을 상속하겠다는 유언을 남겼을 때 그는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또 세계 제1차대전 직후 8백 불에 독일 공채를 매입했는데 이것이 갑자기 6만불로 인상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사실은 독일 민중의 착취물로 지극히 ‘비정상적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그 공채 증서를 난롯불 속에 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그는 ‘부의 덫’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관된 삶을 살았다.
한편, 그가 갈런드 기금의 관리인으로 10년간 일하는 동안, 돈이 얼마나 개인은 물론 조직조차 타락시키는가를 절실히 깨닫기도 했다. 즉 찰스 갈런드가 백만 불(뉴욕 제일국민은행의 주식 포함)의 유산을 받아 자신이 쓰지 않고 진보운동을 위한 기금으로 신탁위원회에 기증했을 때 스콧이 그 기금의 관리인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1920년대 주가가 폭등하자 그 기금은 하룻밤이 멀다 하고 증가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불행하게도 미국의 여러 운동 단체들을 ‘영원한 구걸꾼’으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스콧이 내린 결론은, 개인 차원의 자선 행위는 헛된 것을 넘어 ‘죄악’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스콧에게 학문적인 통찰도 주었다. 즉 빈곤(경제적 불공정)에 대한 일시적 미봉책과 근본적 해결책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수혜자는 기생적 습관을 얻음으로써 구걸을 반복하게 되고 마침내 구걸이 ‘제도화’됨으로써 고착화, 당연시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근본 해결은 지연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가난한 이들로 하여금 자생 의지를 꺾어 빈곤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악습을 양산하는 역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자서전 124]. 그래서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구세군 접근법을 넘어가야 한다.”[자서전 121]고 스콧은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구세군 접근법이란 적십자 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후적이란 뜻이다. 가난한 사람, 부상당한 사람을 사후적으로 치료하는 차원이 아니라(물론 ‘당장 급한 불을 끈다’는 점에서 필요하기는 하나), 구조적 원인이나 전쟁 자체를 예방하거나 제거하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복지국가’라는 것도,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 또는 신식민주의적 국제질서 아래서 정당하지 않은 부의 획득에 기반하여 국내 민중의 배를 불리는 것이며, 다른 편으로는 민중의 자립적, 자율적 삶의 토대를 파괴하고 대신에 국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타율적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근본 한계를 갖는다. 그런 면에서 기존의 복지국가 또는 기존의 사회주의는 민중의 자율성 관점에서 보면 심각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이런 점은 스콧이 “부유한 나라는 부유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재물 때문에 타락하기 쉽다.”고 말한 데서도 나타난다[자서전 125]. “확실히 지속되는 안락보다 더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콧의 인식을 빌면, 우리가 힘껏 일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어 놓고 나면 그제야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삶이란 일상적 긴장과 지혜로운 해결의 연속선이지, 한참 고생하여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 놓고 그 다음부터 안락한 삶만 영위할 수 있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것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재정립해야 한다. 모든 투쟁을 완벽하게 하기만 하면 절로 새로운 사회가 와서 모두가 해방된 사회에서 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꾸준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하고 실천하는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삶의 양식이 구조적으로 깃들게 만드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기존의 혁명 관념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물론 이건 개량주의와는 다르다].
스콧이 사회주의자로서 경쟁적 삶의 방식보다는 협동적 삶의 방식을 옹호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개인주의적인 사기업 사회는 19세기 내내 경쟁을 부추겨왔다. 지난 반세기동안 이 사회는 전쟁이라는 가장 차원 높은 경쟁을 통해 파괴와 살인이라는 끔찍한 수확물을 거둬들였다.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협동을 사회적 사고와 행동의 중심에 두고 경쟁을 효과적인 협동을 위한 하나의 하위개념으로 보는 정책의 급반전 없이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렇게 경쟁을 협동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이다.”[자서전 245].
2. 삶을 마무리하는 방식
내가 스콧 니어링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죽음’을 맞이하던 특이한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삶의 마무리를 하기 10여 년 전부터 미리 삶의 마감 과정을 ‘설계’해 놓고 있었다. 예컨대 그는 스스로 마감할 때가 되었다고 내면으로 느끼기 시작하면 곡기를 끊을 것이고, 삶의 기운이 다하게 될 때 죽는 과정을 하나씩 느끼며 가게 될 것이며, 이런 과정 또한 사랑하는 부인이나 친구들과 함께 나누며 갈 것이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삶을 마감하는 과정을 주위 사람들이 결코 슬퍼하지 말라고 하며 오히려 그 과정을 함께 느끼는 ‘적극적 동반자’가 되기를 바랐다. 자신의 숨이 끊어지면 주위 사람들은 울지 말고 작업복을 입힌 채로 잘 감싸서 몸을 불에 태운 다음 자신이 살던 곳의 농장 한켠에 있는 나무 아래 거름으로 잘 묻어달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을 몸소 실천했다.
이러한 ‘죽음의 설계도’는 스콧이 이미 만 80세가 되던 1963년에 ‘주위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초안을 잡은 것이며 죽기 직전이던 1982년에 또다시 다짐한 것이다. 평생의 동반자였던 헬렌이 남긴 글에 이렇게 정리되어 있다[마무리 221-3].
1. 마지막 죽을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기를 바란다.(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죽음이 가까울 때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단식을 하다가 죽고 싶다.)
2. 나는 (진통제나 마취제 없이)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3. 되도록 빠르고 조용히 가고 싶다. 주위 사람들은 슬픔에 잠기지 말고 조용히 평화롭게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충만하게 살아왔기에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4. 장례 절차와 관련, 직업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에 넣은 뒤 보통 나무 상자에 넣고 조용히 화장하기 바란다. 장례식을 열지 말고 그냥 내 재를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 달라.
5.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것을 요청하며, 이것이 내 뒤를 이어 사는 이웃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나는 소련이나 동유럽 등 여러 사회주의 나라에서 ‘지도자’들이 죽었을 때 범국가적인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을 보면서 ‘사회주의는 우상화의 문제’라는 명제를 반추하며 ‘뭔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한 적이 많다. 사실 사회주의가 아니라도 자본주의에서도 대통령이나 수상이 죽는 경우 범국민적 애도 행렬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 ‘국가주의는 우상화의 문제’라는 명제가 더 타당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죽음에 대한 스콧의 태도는 진정한 사회주의자의 면모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겸손함이요, 자연으로 회귀하는 자연주의자의 모습이며, 죽음을 거대한 변환이 아니라 ‘존재 이전’(옮겨감)의 한 과정으로 포용하는 방식이며, 작업복을 입은 채 자연으로 가고자 하는 진실함이자, 이웃과 함께 죽음조차 함께 느끼고자 하는 참여의 과정이다.
바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진실하고 겸허한 태도는 곧 그의 삶 속에 그대로 묻어났다. 스콧은 살아 있는 동안 청년기 이후 내내 독특하고도 건강한 삶을 살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모교의 강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는 처음부터 진리 탐구에 열성을 다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노동 문제나 분배 문제였다. 미국의 자본가와 정치가, 종교가들의 담합에 의한 ‘소수독재 체제’가 부르는 불평등과 불의에 저항해서 글도 쓰고 강의도 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1917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그는 반전에 관한 글을 써서 여론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반착취, 반전쟁을 향한 그의 목소리가 커지자 그는 대학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다.
그 뒤 그는 반자본주의 정신을 잇고 대안적 삶의 방식을 몸소 실천하며 살기 위해 헬렌 니어링과 버몬트 골짜기 시골로 들어간다. 그 골짜기가 약 20년 뒤에 관광지로 개발되자 그들은 또다시 더욱 멀리 메인주의 외진 곳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스콧은 자신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하루 4시간 노동, 하루 4시간 글쓰기, 하루 4시간 친교 활동 등으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엮었다.
그는 철저한 평화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였으며, 철저한 검약주의자이자 자율주의자였다. 예컨대 그들은 농장에서 채소 외에 닭을 키우지 않았는데 그것은 달걀을 빼먹는 것 자체도 일종의 착취라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의 3/4 가량을 자급했다. 돌로 집도 짓고 “스스로 담을 쌓으면서 누린 기쁨”[지속 157]을 맛보았다. 쓰러진 나무를 모아 땔감으로 썼으며, 먹을거리도 대부분 스스로 길러 먹었다. 스스로 해결 안 되는 것은 단풍나무 시럽을 만들어 판 소득으로 해결했다. 그의 말대로 “‘올바른 사람들’만이 농사짓는 삶에 성공할 수 있다.”[지속 192].
우리나라에서는 스콧과 그의 동반자 헬렌이 사회주의자로서보다는 생태주의자로서 더 잘 소개되어 있지만[마무리, 삶, 지속, 시작 등], 그러한 생태주의자로서의 삶과 사회주의자로서의 삶은 스콧에게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삶의 본질적 요소였다.
예컨대 1920년대 초만 해도 열심히 노동운동에 종사했던 존과 메리 부부 이야기를 보자. 그들은 그 이후에 재물과 권력의 유혹에 넘어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그런 지 10년도 채 안 되어 대기업의 최고위층에 올라가 다른 대기업과 손잡고 군수산업에 진출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불경기 탈피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장성하여 공군 입대를 한 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으로 파견되어 고성능 폭파물 투하 임무를 수행하던 중 사망하게 되었다. 그 며느리가 슬픔을 이기고 남편의 ‘영웅적 죽음’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는데, 그 책 하나가 스콧의 손에 배달되었다. 이에 스콧은 ‘좋은 책을 보내 줘 고맙소.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웅의 죽음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와 같은 위선적인 편지를 보내는 대신, 통찰력과 진정성 넘치는 편지를 보냈다. “훌륭하고 유능한 젊은이들이 이렇듯 거물들의 부름에 응답해 명령에 따라 파괴와 살인을 실행하는 한, 훌륭한 젊은이들은 인생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어머니와 아내들에게 애끊는 슬픔만 남기고 사라질 것이오. … 이 교훈을 깨닫고 조직적인 파괴와 대량 살상에 의존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찾아 따르는 것은 훌륭한 젊은이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소.”[자서전 485-489].
이 편지에 대해 존이 “상실감에 젖은 아내 메리에게 책을 잘 받았노라.”고 써 달라고 요청하자 스콧은 존에게 다시 이렇게 쓴다[자서전 488]. “자넨 나더러 판에 박힌 사교적 거짓말을 하라고 하는군. 메리에게 그 책이 좋은 책이고, 책을 보내줘서 고맙다고 하라고? … 내가 느끼지도 않은 감정을 표현하는 척하란 말인가? 그럴 수는 없네. 그건 적극적인 거짓말이고 나는 그런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네.” 그 뒤 그는 이런 내용으로 (우리 모두에게) 조용히 꾸짖는다. “우리는 도살자와 살인자들의 사회에 살고 있네. 우리는 먹기 위해, 그리고 재미삼아 동물들을 도살하고 재물과 권력을 위해 같은 인간들을 죽이지. 여러 해 전 자네와 메리는 우리의 사회시스템을 운영하는 약탈자와 살인자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지. 그 대가로 자네 부부는 꽤 안락한 생활을 누렸고 어느 정도 인정도 받고 힘도 갖게 되었지. 그런데 그들이 자네 부부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어. 그건 자네 부부가 약탈자와 살인자들이 운영 하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 치른 대가의 일부였지. 사실을 외면하려 해봐야 소용없다네.”
이런 식으로 스콧은 탐욕으로 가득찬 경쟁사회에서 올바로 사는 방법으로서, 소수의 독재자들에게 아첨하며 배부르게 먹다가 소화불량과 심장마비에 걸리지 말고 오히려 지출을 줄이고 자급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라고 충고한다. 성실성, 지혜, 신중함으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안정, 안락, 편리 등은 소수독재체제의 미끼라고 보았다. 반대로 창조와 변화 위주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진보주의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스콧이 자신만의 삶을 마무리하는 방식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직결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바른 생활’이란 것인데,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8정도, 즉 “다른 모든 생물들에게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되는 옳은 일에 종사하는 것”이다[자서전 128]. 그가 죽음의 과정을 이웃과 함께 느끼며 나누려 한 것이나 죽어서도 한줌의 재가 되어 나무[땅]의 거름이 되고자 한 것이나 모두 ‘바른 생활’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는 학자로서도 ‘바른 생활’을 일관성 있게 유지했다. 1881년 6월, 하버드 대학의 웬들 필립스가 ‘공화국에서의 학자’라는 강연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동시대인의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환기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게을리 한다는 것은 곧 사회인으로서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과 같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하자 그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또 위스콘신 대학의 E. A. 밴 하이스 교수가 “교육자란 탐구하고 가르치고 공동체 내에서 진리를 행사하는 역할을 할 책임과 의무를 지닌다.”고 갈파하자 이에 적극 찬동했다[자서전 136]. 그는 이런 견해에 동조했을 뿐 아니라 직접 몸으로도 실천했다. 그 실천은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이나 저술 활동으로 나타났다.
3. 사회 활동
그는 젊은 시절에 모교의 대학 선생이 되어 진리 탐구에 열중하게 되었으나 결코 대학 교수로서 안락한 생활을 꿈꾸기보다는 진실과 진리의 구현에 일관되게 헌신한다. “내가 속한 사회에 착취와 부패가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에 대항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자서전 136]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그는 1911-15년 사이에 6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모든 연구의 공통된 결론은 “사기업 중심의 자본주의가 반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분배구조를 낳는다.”는 것이었다[자서전 135]. 그는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워튼 스쿨 교수진 내 8명의 동지들과 함께 이론과 실천을 함께 해나갔다.
그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반전운동을 주도하게 되는데, 1917년에 ?거대한 광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의 징집법안을 “비미국적이며 헌법정신과 미국의 전통에 명백히 위반되는 법안”이라고 비난했다[자서전 29]. 그가 보기에 전쟁이란 “문명국가들이 조직적으로 저지르는 파괴와 대량 학살이자,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벌이는 힘겨루기”였다. 이 책으로 인해 그는 스파이법을 위반한 혐의로 연방법원에 기소되었다. 전쟁 중이던 1917년 4월에서 1918년 11월까지 미국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관련, 기소된 이는 모두 4천5백여 명이었는데 1천 5백 정도가 유죄 판결로 투옥되었다. 그 중 998명이 스파이죄였다. 흥미롭게도 진짜 간첩 중 스파이법에 의해 처벌받은 이는 하나도 없었고, 이 법으로 처벌받은 이는 주로 급진(민주)주의자와 평화주의자들이었다.
이 무렵 스콧은 공산당에 가입했고 1918년에는 현직 의원이던 피오렐로 라 가르디아에 맞서서 선거에도 출마했다. 출마의 변으로 “현 민주당 정부가 스파이법 등의 법을 만들어 헌법에서 보장된 권리들을 제한하고 부정하는 것에 반대하여 의회에 진출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1918년 11월 선거에서 스콧은 가르디아에게 1만 4천대 6천표 정도로 패배했다.
1919년에 스콧은 반전운동 중 스파이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 재판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며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자서전 31]. 그는 자유롭게 자기 견해 밝히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 권리임을 일관되게 주장하였고 마침내 그의 저술인 ?거대한 광기?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1945년 8월, 스콧의 62번째 생일날 공교롭게도 트루먼이 원자탄 투하 명령을 내리자 스콧은 트루먼에게 편지를 보내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나의 정부가 아닙니다. 오늘부터 우리의 길은 갈라집니다. 당신은 계속 세계를 파괴하고 이 세상을 고통에 빠뜨리는 당신의 행로를 가겠지요. 그것은 자살행위입니다. 나는 협력과 사회정의,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기초한 사회의 건설을 돕는 일에 착수할 것입니다.”[자서전 363-4]라고 격렬히 항의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적을 무찌르고 미국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핵에너지를 사용하기로 한 것을 “서구 문명의 사형선고”라고 정의했다.
그런 이런 식으로 노동문제와 전쟁문제를 집중 분석하면서 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가 인류 문명의 미래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또 다른 일례로, 국제연맹 규약이 선포된 직후 뉴욕의 센추리 극장에서는 대단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그 주제는 “국제연맹이 노동자에게 이익을 주는가?”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으로 나선 하버드대학의 앨버트 하트 교수는 국제연맹이 평화의 대안이 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에게 최선의 해답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국제연맹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스콧은 이에 대해 대안이 있다고 말했다. “한 나라의 정부란 국민의 동의로부터 정당한 권력을 도출하는 기관이다. 그런 과정을 무시하면 그런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다.” 노동자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는 정부나 국제연맹은 폐지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것이다.
또 1921년 1월에는 뉴욕 렉싱턴 극장에서 토론과 강연이 있었다. 그 주제는 대단히 예민한 주제인 “미국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가?”였다. 자본주의 옹호가 콜럼비아대 경제학과 E. R. A. 셀리그먼 교수는 스콧의 기본 강연에 대해 논박했다. “자본주의 비판도 맞지만 장단점이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생활수준 향상에 기여했다. 다만 사회 변화는 점진적이니 인내력을 가지라. 게다가 자본주의에 대한 대체물이 없다. 자본주의는 그 결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최상의 체제다. 서양 문명사에서 인류 최고 발명품이 자본주의 아닌가.”[자서전 145]. 이런 식의 자본주의 옹호론에 대해 스콧은 일일이 반박하며 사회주의야말로 노동자가 추구해야 할 대안이라고 제시했다.
1960년대에 그는 시카고의 대학생들에게 한 강연에서 이렇게 칠판에 썼다. “지배계층의 프로젝트는 착취이다. 그 기법은 물건축적, 마약 제조, 속임수 등이며 결과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에의 종속, 망각, 타락과 붕괴 등이다. 반면 자유론자[해방주의자]의 반프로젝트는 해방이다. 그 기법은 검약, 금욕주의, 목표 설정이며, 결과는 자립, 에너지 보존, 성장이다.”[마무리 177].
스콧이 헬렌과 함께 사회적 삶의 장을 옮겨 자립적 농업 노동을 기반으로 하며 생태적 삶을 산 과정을 우리는 결코 사회주의자로서의 스콧과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그가 ‘현실도피형’ 삶을 살았다고 보는 것은 그의 삶을 오독하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농사를 통해 땅과 함께 살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저술이나 강연, 사회운동을 통해 민중과 함께 살았다. 마치 그가 무슨 석사 학위나 박사 학위를 따지는 위선적 부르주아 사회의 타이틀을 거부하고 ‘인생역경대학’에 입문한 것으로 자신의 삶을 규정한 것처럼, 그는 인생 자체를 하나의 시험 과정이라 보았다. 그 시험에 대한 답은 결국, 땅과 사람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시골생활은 미친 세상에서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삶의 한 예이자 본보기이다.”[자서전 411]. 이런 면에서 그는 미친 사회라고 규정한 자본주의, 제국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생태적 자치사회’를 몸소 실천하면서 평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대학 강단으로부터 추방당한 시기는 매카시 선풍으로 좌파들이 원자화하거나 고립되거나 체제순응적으로 길들여지던 시기로, ‘저항이냐 굴복이냐’ 하는 갈림길에 있었다. 마침내 그는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로 가지 않고) 미국에 남아 미국적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소박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 해답이 ‘자급농’이었다[자서전 374]. 그것은 하루를 생계 노동 4시간, 지적 활동 4시간, 친교 활동 4시간으로 꾸릴 수 있는 ‘조화로운 삶’(good life)이기도 했다.
“미국적 삶의 방식은 추악하고 천박하고 방종한 방식이다. 따라서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안락한 도시생활을 뒤로 한 채 짐을 꾸려 숲으로 떠나고 있는 현상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좀 더 나은 새로운 삶의 방식, 문명에 찌들지 않은 소박하고 단순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자서전 368].
스콧이 강조하듯 “모든 계급사회의 밑바탕에는 ‘네가 일하고 나는 먹는다.’는 원칙이 깔려 있”[자서전 357]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계급을 타파한 사회의 원칙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일해서 내가 먹는다.’ 또는 ‘우리가 일해서 우리가 먹는다.’가 아닐까?
‘우리가 일해서 우리가 먹는’ 원칙이 실현된다는 의미에서, 스콧이 생각한 사회주의는 이런 것이다[자서전 244-248]. 첫째, 공동체 전체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제 부분들은 공동체가 소유하고 관리해야 한다. 간선도로, 우체국, 학교, 보안림 등은 공익을 위해 정부가 관리해야 한다. 철도, 전화, 전력, 공장, 석유, 광물 등 공동사업들은 인민이 소유하고 인민을 위해 운영해야 한다. 둘째, 광산, 공장, 철도, 대량유통 수단들과 같은 사회적 생산기구들을 사회가 소유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정치권력을 획득[행사: 필자]해야 한다. 셋째,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 사회적 사고와 행동의 중심에 자리잡아야 한다. 경쟁은 오직 효과적인 협동을 위한 수단인 한에서만 의미가 있다. 넷째, 식의주 해결은 물론 표현과 개발과 창조를 위한 노동이 중요하다. 다섯째, 도로, 가로등, 도서관, 공원 등과 마찬가지로, 식의주 이외에 교육, 의료 등도 사회가 제공해야 한다. 여섯째, 개인들은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해결하게 하되 노인, 병약자, 어린이를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표현, 개발, 개선, 창조의 에너지를 발휘하도록 한다. 결국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인간적 삶을 살기 위한 협동을 하게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만인은 한 사람을 위하고 한 사람은 만인을 위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콧이 사회주의 사회를 결코 고정된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사회주의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의 기정사실이라기보다는 미완의 사건이다.”[자서전 464]라고 하거나 “사회주의는 ‘완제품’이 아니라 성장하고 변화하고 발전하고 진화하는 사회제도들의 결합체”[자서전 465]라고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시련과 시행착오와 교정과정을 거치면서 한 단계씩 배워나가듯이 사회주의도 그렇게 학습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저 유명한 에디슨도 제대로 된 백열전구를 만들기까지 6백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한다.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 중에는 효율적인 방법만 있는 게 아니라 비효율적인 방법도 있다는 것이 스콧의 생각이다. 스콧에 따르면 “천재는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른 길을 마음속에 그리며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자서전 467]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함께 사는 대안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들 역시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4. 연구 저술
스콧의 삶에 대한 태도가 물씬 묻어나는 것은 무수한 사회 활동 이외에 체계적인 저술 속에도 있다. 그는 최초로 출판한 공동 저술인 ?경제학?(1908, 1912)을 통해 대학생과 고등학생을 위한 경제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했다.
특히 그는 1911-15년 사이에 ?아동노동문제의 해결책?, ?미국의 임금체계?, ?임금노동자 가족의 생계?, ?소득?, ?생활비의 절감?, ?부와 빈곤? 등 6권의 책을 지음으로써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체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예컨대 ?아동노동문제의 해결책?에선 광산업 등 다양한 업종에서 아동노동에 대한 착취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임금노동자 가족의 생계?에선 자본가에게는 순수익에 대해 세금을 매기지만 노동자에게는 총수입에 대해 세금을 매긴다고 하여 불평등한 분배 구조를 갈파했다.
또 1912엔 첫 부인인 넬리 시드와 함께 ?여성과 사회진보?를 펴냄으로써 가부장적 권위주의 사회를 혁파하는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적극 옹호했다. 또 1917년의 ?거대한 광기?는 “상업주의가 전쟁의 원인과 목표”라고 일갈하며 미국이라는 ‘전쟁 기계’를 움직이는 배후 기제를 정밀 분석했으며, 1923년의 ?석유, 전쟁의 씨앗?은 오늘날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이미 오래 전에 스콧이 특유의 통찰력으로 해명했다.
한편, 수백 장의 사진과 함께 1929년에 나온 ?블랙 아메리카?는 미국 내 흑인들이 당하는 폭력을 생생한 필치로 묘사한 책으로, 흑인들이 예사로 ‘니그로’(깜둥이)로 불리던 시절에 흑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 본격적인 흑인 민권운동 이전에 스콧은 이미 그의 저술에서 흑인 민권 운동을 한 셈이다.
특히 그는 ?제국의 황혼?(1930년)에서 제국주의를 ‘1870년대 이후 독점자본주의의 역사적 단계’로 묘사하는 레닌과 달리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문명화된 인간사회의 필수요소”로 파악하여 “역사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 패턴”으로 인식했다. 이로 인해 그는 공산당과 마찰을 빚었고 마침내 탈당계를 내고 말았다[자서전 285]. 나아가 1933년의 ?파시즘?에서 스콧은 파시즘이야말로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한 형태, “붕괴되어 가는 자본주의의 논리적 국면”[자서전 338]이라고 간파했다. 그의 통찰에 따르면 파시즘이란 “당대의 경제 및 정치의 위기를 뚫고 나가는 데 불가피해 보이는 개혁조치들을 통해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파시즘이란 개인 독재와 관리 경제, 대외 전쟁을 통해 자국 내 자본의 축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자본의 한 전략으로 자리매김된다. 이렇게 보면, 파시즘이란 히틀러와 같은 특수한 인물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자신의 축적 위기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는 역사적 형태의 하나인 것이다.
1945년 스콧은 ?민주주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제국의 비극?을 집필하여 미국 등 서양 세계가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의 허구성을 꼬집으며 풀뿌리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1946년과 1947년에 그는 ?전쟁이냐 평화냐??를 집필하고 ?우리 시대의 혁명?을 출간하여 반전평화주의자,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진지하게 드러내었다.
1954년엔 1932년부터 약 20년간 버몬트에서 농촌생활을 한 삶의 여정을 기록한 ?조화로운 삶?이란 책을 펴냈는데, 도시문명에 환멸을 느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침서가 되었고, 그 뒤 1979년엔 ?조화로운 삶의 지속?을 써서 메인주에서 자급농으로서 삶을 기록한 책을 펴냈다. 이러한 기록은 단순한 전원생활의 기록이거나 노후의 삶을 이야기한 회고록이 아니라 ‘미친 세상’에 저항하면서 자립적 생존을 이루는 대안의 삶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1932년에 시골로 들어갔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달아나려거나 사회에 관심을 덜 가지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길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생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치 있는 일에 참여하고 우리 몫을 해내는 데 알맞은 생활방식을 찾고 싶었다.”[마무리 143].
5. 한 ‘사람’으로서의 스콧
스콧은 만 25세가 되던 1908년에 넬리 시드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평범한 중산층으로서 유복한 생활을 하기를 원하던 시드와 여러 면에서 마찰이 있었다. 특히 그가 두 번씩이나 대학에서 추방당하고 마침내 공산당에 입당하고 스파이법 위반 혐의로 재판정에 서게 되자 시드와 스콧은 별거에 들어간다. 두 아이들(로벗과 존)도 아내 시드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전 재산을 넘겨준 채, 이제 스콧은 홀로 떨어져 ‘자기만의 삶’을 추구한다. 그러던 중인 1928년에 스콧은 영원한 동반자 헬렌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스콧은 45세였고 헬렌은 25세였다.
헬렌과의 첫 데이트에서 스콧은 “따뜻하고 힘이 있었으며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마무리 18]. 헬렌은 스콧의 “친절하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말투, 꾸밈없는 수수함”과 “사려 깊은 아저씨 같은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도살한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헬렌은 대단히 기뻐하며 만일 “그이가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더라면 함께 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헬렌이 스콧에 대해 가진 첫 인상은, “지적이고 생각이 깊으며 유머가 있고 솔직한” 데다 “분별 있고 확고하며 균형 잡힌 훌륭한 품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헬렌이 스콧과 함께 걷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그 사람에게 키스했”던 것은 분명 “그이에게 확신과 신뢰와 존경을 전해”[마무리 19] 주는 표시였다. 헬렌에 따르면 스콧의 인간성은 “일상생활에서 (사소함을 넘어) 진리를 추구하고 그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스콧이 헬렌과 함께 한 55년간의 동반 생활은 “원칙에 충실하고 타협하지 않으며 지적인 변혁가이자 꾸밈없고 친절하며 현명한” 사람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청년기의 스콧은 할아버지가 경영하던 펜실베이니아 지방의 광산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받아들인 핀란드와 헝가리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가난을 목격하고서, 그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은 빚을 지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는 20대 초반이던 1905년에 공개 강연에서 “근대사회에 생겨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엄청난 불평등에 충격을 받았습니다.……부자는 기회의 천국에서 살고 있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의 지옥에 빠져 있으며, 부자의 천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지옥을 딛고 있습니다.……나는 가난에 대해 들었고, 불행과 악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 지역의 모든 마을과 도시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능력과 재능의 싹이 눌려 있었습니다. 진보의 가능성과 함께 폭넓은 기회가 마련될 수 있고, 투표소에 같이 가서 10년 안에 상황을 개혁할 수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마무리 22-3]라고 하였다.
생각컨대 이런 통찰력, 즉 “부자의 천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지옥을 딛고 있다”는 혜안은 오늘날 모든 사회의 불평등 구조 자체가 가진 모순의 정곡을 찌르는 발언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학교에서부터 노동시장, 직장, 일반 사회에 이르기까지 불평등한 피라밋형 사다리 질서 자체를 수용한 상태에서 서로 앞을 다투어 기득권층에 들기 위해 높이 오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이 시도는 근원적으로 두 가지 모순을 안고 있다. 하나는 제 아무리 노력해도 ‘모두가 오를 수는 없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상부의 천국은 하부의 지옥에 토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속일 수 없는 진실을 억지로 속여 가며 모두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력하기만 하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속이는 것이 자본과 권력, 언론과 교육이 아닌가. 이러한 허구를 스콧은 이미 100년 전에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가 노동문제에 천착하면서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화살을 쏘아대고, 또 전쟁 문제를 분석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에 동참하지 말 것을 호소하자 대학 당국은 40세도 채 안 된 그를 두 번씩이나 추방했다. 이에 대해 스콧은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이상적인 삶은 어떤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그 이상이 관례에서 멀어질수록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기록하거나 “그 자신의 길을 따라가면서 거기에서 통행료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지난 교수생활 11년은 최고의 시간들이었으며 가장 행복하고 값진 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은 인간적인 친교와 아울러 든든한 연대의 끈을 맺게 해준 나날들이었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만족스러운 시간들이어서 나는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조금의 후회도 없다.”고 썼다[마무리 25].
그가 실망스런 상황 앞에서도 솔직하게 드러낸 내면의 평정함은 오히려 그가 가진 삶의 진정성에 근거한다. 즉 해직이나 패배, 실패와 같은 실망스런 상황 앞에서 절망과 좌절에 빠진다면 평소의 자기 삶 속에 진정성이 강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스콧은 그 반대였다. “속된 삶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성공하고 유명해진다. 양심을 지키는 삶은 소명에 따라 행동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정의롭게 된다. 성공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유명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반면, 정의로움은 영원한 진리의 반석이 된다.”[마무리 27].
그러한 시련은 그가 1917년 ?거대한 광기?를 써서 전쟁의 본질을 지적하며 반전운동을 부추겨 스파이죄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또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를 공개적으로 자신의 평화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드러내고 말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전세를 역전시켰다. “너무나 거리낌 없이 생각을 드러냈기 때문에 기성제도에 큰 위협이 되”었으며 결코 그로 인한 고립과 박탈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 생각컨대 이런 위기들을 기회로 전화시키는 능력이야말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라 본다.
1932-3년경 헬렌과 사랑을 나누던 시기에 스콧은 이런 편지를 쓰기도 했다. “당신은 활력이 있고 앞으로도 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성숙한 사람입니다. 내가 가까이 있으면 당신은 언제나 충분한 공간을 얻지 못합니다. 앞으로 몇 주일은 당신에게 성장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줄 것입니다. 그 기회를 최대한 살리십시오.……실제로 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그리고 낮과 밤 동안 계속해서 우리는 함께 있습니다. 다가오는 주간들을 당신의 성장 기간으로,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서로 공유하고 동지애를 발전시키는 기간으로 만듭시다. 헬렌,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가까운 내 친구이자 동지입니다.”[마무리 105].
스콧은 헬렌이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진정한 동지로 함께 살기를 소망하며 이런 편지도 썼다.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연인들 뒷전에서 맥없이 따라갑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당신이 독립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아울러 우리가 공통 관심사를 가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기간이 당신에게 당신 자신의 지적 생활을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며, 나는 당신이 그 기회를 활용하여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마무리 114].
그 뒤 헬렌과 함께 스콧은 버몬트 골짜기에 돌집을 짓고 살게 되는데, 농장에서 일하지 않을 때 그는 경제 문제나 국제 문제에 관한 글을 썼다. 그는 매월 <세계의 사건들?이란 제목으로 뉴스 해설지를 발간했다. 아무런 후원도 없고 아무런 검열도 없는, ‘독립신문’이었다. 또한 그는 ?통합된 세계?, ?세계 권력 소련?, ?민주주의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국의 비극?, ?전쟁이냐 평화냐?, ?우리 시대의 혁명? 등 사회과학 서적을 펴냈는데 비용 대부분은 스콧의 강연료 같은 것으로 메웠다. 그는 검소하고 절약하는 습관으로 생활 문제를 해결했다. “당신의 수입 안에서 생활하라. 얻는 것보다 덜 써라. 쓴 만큼 지불하라.” 이것이 스콧의 경제 원칙이었다. 또한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는 것이 그의 삶의 원칙이었다. 그는 이를 손수 실천했다. 한번은 캘리포니아에 사는 일류재단사인 친구가 양복 한 벌을 스콧에게 선물로 보내자 고마움과 함께 이런 편지를 썼다. “……하지만 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풍요로움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고, 유행이나 모양새에도 관심이 없네. 나는 대체로 옷을 잘 입는 사람들이 품게 마련인, 남보다 우월한 느낌이 들게 지나치게 몸과 마음을 가꾸는 습관을 받아들이지 않네.”[마무리 130]. 이런 식으로 그는 “다른 사람이 사는 방식과 기호에 맞춰 살지 말고 자기 개성에 따라”[지속 182] 살기를 권했다.
스콧은 당장 눈앞의 생활수준을 높이기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일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마무리 132].
그러한 시각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스콧이 어느 강연장에 강연을 하기 위해 허름한 옷을 입고 들어가려 했을 때 입장권을 받는 이가 “입장료를 내지 않으면 못 들어간다.”고 했다. 이 때 스콧은 자신이 강연자라고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것이다[마무리 133].
<먼슬리 리뷰> 편집장인 레오 후버만은 뉴욕에서 스콧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분은 자기가 말한 대로 쓰고, 학자로서 폭넓은 독서를 했으며 증거를 가려 탐구했고, 자기가 발견한 것을 단순하고 정직한 언어로 기록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 계층은 예외 없이 스콧 니어링을 위험인물로 간주합니다. 이분은 그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위협합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회과학자로서 그 사람들의 지배체제를 위협합니다.……대부분의 사회과학자와 달리 자기가 발견한 것 때문에 다치거나 그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오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가 본 것을 알리는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타락한 사회에서 이 분은 타락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마무리 179].
그가 1960년대에 사회주의 계열의 한 동지에게 보낸 편지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미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분열된 까닭은 한편에서 보면 이 나라에서 가르치고 있고 또한 실현 중인 극단의 개인주의 때문입니다.……우리 앞에 가혹한 시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베트남에서 미국 무기로 무장한 사람들이 5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 꽤 분명해 보입니다.……그러한 모험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미국 국민에게 연간 250억 달러에서 300억 달러의 예산을 부담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경제에 도움을 줍니다만, 따지고 보면 차라리 미국 무기업자들에게 250억 달러를 지불하는 것이 훨씬 싼 편이 될 것입니다. 그 편이 베트남에서 희생되는 생명을 구하고 전 세계에서 미국의 명예와 선의를 잃게 만드는 위험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마무리 192-3].
또한 스콧은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만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윤리입니다. 버나드 쇼의 말대로 ‘당신은 동물 시체를 먹어치우는 끔찍한 버릇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지요?’ 우리는 고기를 먹어야 할 합당한 까닭을 찾지 못했습니다.”[마무리 198]. 기계사용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서도 스콧은 “나는 손을 써서 하는 의사소통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편지를 손으로 쓰고 있습니다.……나와 내가 종이 위에 쓰려고 하는 것 사이에 기계가 끼어드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돌아다닐 일이 있으면 나는 되도록 늘 걸어 다닙니다. 어쩔 수 없을 때만 기계 교통수단을 이용합니다.……인생은 단추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고 건설하며, 일정한 형태로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마무리 201].
6. 교훈 - 그를 이어 가기
자본주의 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구조적으로 해명한 칼 맑스는 1818에서 1883년까지 살았다. 그의 삶을 잇듯 스콧 니어링은 1883년에서 1983년까지 살았다. 스콧은 “나는 독점자본주의에 반대하지만 정통맑스주의자는 아니다.”[자서전 471]라고 하면서 칼 맑스 또는 맑스주의자와 일정한 거리를 두긴 했지만, 나는 스콧이 칼 맑스의 문제의식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콧이 ‘맑스와 함께 맑스를 넘어’ 살고자 했다고 확신한다.
그는 땅을 소유하되 땅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닭을 착취하지 않기 위해 사육하지 않았고, 강의를 하되 주최측의 환심을 사거나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잉여가 생겨 착취하는 일이 없이, 필요한 만큼만 이루어지는 경제”[삶 7]를 그는 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체제를 아주 나쁜 것으로 생각한다.”[삶 48]. 그는 식사를 하되 동물의 시체보다는 신선한 채소를 좋아했고 하루 4시간 노동, 4시간 지적 활동, 4시간 친교의 시간으로 스스로 해방된 삶을 살았다. “이처럼 우리는 노동시장으로부터 독립해갔고, 생필품도 거의 시장에 의존하지 않았다.”[삶 7].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아끼면서 꾸짖되 증오하지는 않았으며, 권력과 자본에 저항하되 기회주의적으로 타협하거나 그 덫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따돌림을 받거나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을 때 좌절하기보다 당연한 대가로 수용했고 두려워서 떨기보다 당당하게 자기 갈 길을 걸어갔다.
그가 떠난 1983년 이후 이 세상은 온통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이 판을 치고 있다. 초국적 자본이 온 세상을 새로운 제국으로 재편하고 있다. 이런 환경 변화 속에 과연 그 누가 스콧을 이어 진정한 생태사회주의자로서의 삶을 한 단계 더 승화된 형태로 보여줄 것인가? 아니 과연 우리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스콧의 삶을 본받아 자기 행복과 사회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게 될 것인가?
스콧은 이미 1972년의 자서전에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서 “과거의 교훈을 배우고 미래의 한 부분으로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라.”[자서전 482-485]고 답하고 있다. 그 핵심은 이런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부르주아(독점자본주의) 사회의 관념에 길들여진 인간들이다. 문명이 지닌 결함을 우리 자신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습관과 관습과 제도를 거부하는 부정적인 행위로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 한마디로,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긍정’, 이것이 우리 삶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스콧은 이에 대해서도 몇 가지 걸음들을 말한 바 있다.
첫걸음은 “부르주아 소수 독재자들이 발전시키고 통제하는 대중매체를 통해 발표되는 시사 프로파간다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언론과 교육의 힘은 가히 압도적이다. 이미 우리의 의식과 영혼은 부르주아 지배층의 그것에 물들어 있다. 기층 민중이 기층 민중의 존재에 토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층이 강요하는 의식에 물든 현실, 바로 이것이 기층민중의 자기배신이다.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다음으로 “부르주아 사회가 충실한 봉사에 대한 답례로 제공하는 물질적 보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개 중간층이나 기득권층이 가진 허위의식이다. 사실은 기득권층은 자신이 향유하는 기득권(돈이나 권력, 지위, 명예 등)이 사실상 기층 민중이 희생당한 희생물에 토대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거나 알더라도 눈을 감는다. 나아가 스스로 얼마간의 자선을 행하거나 가진 자의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다함으로써 자신이 훌륭한 존재임을 자랑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득권층이 자신의 존재를 솔직히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배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극복해야 한다.
셋째는 “독점자본주의 정책들을 용인하거나 정책결정과 실행에 참여,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기층 민중과 기득권층이 보이는 이중의 자기배신을 그만두고 더 이상 지배체제에 협력하기를 그만둔다면 기존 지배질서는 급속히 허물어질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넷째, “기성 부르주아 체제와 심리적·사회적·경제적 관계를 끊어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지위나 명성, 직업, 수입, 승진 기회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가야 한다. 스콧이 말하는 ‘인생역경대학’은 그래서 대단히 거칠고 험한 곳이다.
다섯째, 기존 사회 질서에 강력하게 맞서는 것과 더불어, “뚜렷한 목표를 가진 의식 있는 사회집단의 자제력 있는 구성원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기”다. 결국은 일상적으로 대안적인 삶의 주체로 거듭나야 하고 그것이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사회적 실천을 해야 한다. 변화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적 실천을 꾸준히 하는 한, 역사의 변화는 오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