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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날마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karmaflowing 2011. 7. 17. 07:37

기독교사상 2009년 1월호

 

제목 : 날마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부제 :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이강숙 선생은 193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했고, 미국 휴스턴 대학에서 음악문헌학 석사를, 미시건 대학에서 음악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 컴원웰스 대학 조교수를 일했고 1977년 귀국해 서울대 음대에서 1993년까지 재직했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으로 10년 동안 재직하면 학교의 기반을 조성했다. 『한국음악학』 『음악의 이해』 등의 저서가 있으며 장편소설 『피아니스트의 탄생』과 소설집 『빈 병 교향곡』, 산문집으로 『술과 아내 그리고 예술』 등을 선보인 바 있다.

 

 

그의 눈은 깊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단초를 하나씩 풀어낼 때마다 깊음은 더해갔다. “70이 넘은 지금도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는 그이의 말은, 웅숭깊은 삶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부박(浮薄)한 현실에서, 그이의 고민은 삶을 관통하는 일관된 물음이자 시대를 바라보는 끊임없는 성찰의 목소리이다.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는 70이 넘어서도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청년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책으로 만난 새로운 세상

거실에 놓인 그랜드피아노는 그가 피아니스트임을 조용히 말해 주고 있었다. 피난 시절이던 중학교 2학년 때 피아노와 조우한 그는 베토벤의 <월광소나타>에 매료되었고, 일찌감치 삶의 길을 음악으로 잡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모두 법대, 의대를 가던 시절이라 가출을 감행하면서까지 그는 음대에 입학했다. “이미 피아노 소리에 완전히 영혼을 빼앗긴 상태라 다른 공부나 다는 분야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라”는 이에게 판검사, 의사가 무슨 대수였겠는가 싶다. 가난한 집안에 피아노가 있을 리 만무했고, “수업만 끝나면 집에다 책가방을 던져두고 교회나 학교 강당의 피아노 있는 데를 찾아가는 게 일”이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서울대 음대 강사와 계명대에서 조교수 생활을 하던 그는 음악평론을 썼다. 1965년부터 꼬박 1년을 한국일보에 음악평론을 기고하며 “한국 음악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피아니스트로 남던가 음악평론가를 나서던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무언으로 압력했다. 세상의 벽이란 예나 지금이나 두터운 법이다. 이후 1968년 미국 유학을 떠났고, 휴스턴 대학에서 음악문헌학으로 석사를, 미시건 대학에서 음악교육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기간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음악 서적들로 인해 한 번 놀랐고, 한국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다양한 음악 장르에 다시 놀랐다. 음악을 학문이 아닌 기술로 치부하는 한국 풍토와는 다른 세상에서 그는, 음악학에 눈을 떴고 음악교육학은 물론 음악의 사회적 현상을 연구하는 음악인류학을 처음 접했다. 그렇게 발군의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유학길에 올랐던 이강숙은 음악문헌학과 음악교육학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음악에 국경이 없다고 말하지만 난 늘 음악에 국경이 있다고 말해요. 모든 문화현상이 그렇듯, 음악도 시대의 산물이잖아요? 시대의 산물이며 문화현상으로 이해하려면 음악도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음악교육학으로 진로도 바꾼 거죠. 그저 피아노 건반만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과 한 음 한 음이 연결되는 상관관계를 알면 더 재미있게 들을 수 있어요. 이 모든 게 유학 시절 만난 책에서 비롯된 거니까, 오늘 내가 있는 것은 책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문학으로의 귀향

1977년 모교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이강숙 선생은 1992년까지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숱한 명강의를 선사했다. 그가 학기마다 강의했던 <음악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은 서울대생들이면 누구나 수강했던 명강의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교육가였던 그를 탁월한 행정가로 변신시킨 사건은 1992년 말 발생했다. 당시 설치령 하나만 주어진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맡아달라고 문화부 장관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위암 수술을 받고 생사의 기로에 서있던 때였다. 그는 허허벌판에 학교를 세우며 김남윤, 정명화 등 쟁쟁한 교수진을 영입했고, 학교의 직제를 체계적으로 확립해 갔다. 이후 10년 동안 총장으로 재직하며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오늘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발판이 되었다.

교육행정가로 변신해 새로운 삶을 살던 이강숙 선생이 정년을 1년 앞둔 2001년, 삶의 도구를 바꾸었다. 평생 음악을 밑천 삼아 산 그이가 문학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난 음악이라는 도구로 살았지만 마음에는 언제나 문학이라는 병을 품고 살았어요. 좋은 소설이 이제 내 도구인 셈이죠. 이때부터 병이 조금씩 치유되었다고 할까요….”

2001년 <현대문학>에 「빈 병 교향곡」을 발표하며 등단한 그는, 연이어 몇 편의 단편과 장편 『피아니스트의 탄생』을 선보이며 음악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문학평론가인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의 작품을 두고 “문학이 원하는 것은 바로 감각으로 사는 인간의 삶을 하나의 의미의 구조 속에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이강숙 선생의 글과 말씀에 접해온 나는 그의 소설이 이 여러 가지 것들을 하나로 묶는 구축물이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제 그의 소설이 소품에서 교향악으로 그 폭을 넓힌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이청준과의 만남, 그리고 클래식 음악 대중화 작업

평생 음악과 함께 살았지만, 음악과 함께 삶을 지탱해준 것은 사실 문학이었다. 대학 시절, 피아노 연습으로 혹사한 몸은 폐결핵에 걸렸고 결국 수술까지 하고 2년 동안 요양했다. 무료한 일상에서 문학은 새로운 빛이었다. 헤르만 헤세와 조르주 상드, 앙드레 지드, 도스토예프스키, 카뮈와 샤르트르를 만났다. 『삼국지』와 『수호지』, 『홍루몽』, 『북간도』 등을 읽으며 이전에 몰랐던 다른 세상을 만났다.

다른 세상과의 조우는 습작으로 이어졌고, <사상계>에 단편 「방황의 시간」을 응모하기에 이르렀다. 응모한 햇수도 정확히 기억한다. 1965년. 이청준 선생이 단편 「퇴원」으로 등단한 해였기에 더더욱 잊지 못한다. 이청준 선생과는 폐암으로 세상을 버릴 때까지 연을 놓지 않았다. “지금도 이 선생을 잊지 못해요. 여러 가지 인연으로 가끔 만나 문학과 철학을 함께 논했고, 인생을 이야기했어요. 아직 아까운 나이인데….”

미국 유학 가서도 학기를 마치면 2-3주 여유 기간 동안 각종 문학을 탐독했다. 다양한 전공을 가진 한국 유학생들과 대화할 때면 언제나 문학을 화제로 삼곤 했다. 사람들은 “이 형은 음악하는 사람 맞아요?”라고 수도 없이 되물었단다.

<사상계> 낙선 당시에는 자신의 작품을 낙선시킨 심사위원들을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유학과 교수 생활을 마치고 10년 만에 귀국해, 처가에 있던 짐을 찾아오던 날, 「방황의 시간」 원고뭉치를 발견하고는 다시 읽으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첫 문장은 어떻게 봐줄 만했지만 다음 문장부터는 자기 자랑과 푸념만 일삼는 “손이 떨리고 도저히 낯을 들고 볼 수 없는 글”이었다. 몇 번 작품을 응모하고 이후로 10년 동안 미국에서 기고만장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 일 이후로 사람이 좀 겸손해지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욕심도 버리고 음악 관련한 글만 쓰려고 했던 거죠.”

그렇게 문학을 내려놓고 다시 음악평론가로 살았다. 4대 일간지를 비롯해 많을 때는 한 달에 17개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요즘 클래식 음악 대중화를 위한 숱한 강연과 연주회가 열리지만, 클래식 음악 대중화의 효시는 바로 이강숙 선생이었다.

 

한 번도 음악이 내 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다

주마등처럼 스쳐간 인생을 정리하던 이강숙 선생은 간간이 세상사는 이치를 이야기했다. 유난히 “부끄럽다”는 말을 많이 쓰던 그이는, “한 번도 음악을 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2001년 등단하고, 작품 구상과 집필을 위해 토지문화관에서 4개월, 만해마을에서 4개월을 머물렀다. 하지만 음악 공부하는 후배들은 선배의 잠적이 못 마땅했고, 토지문화관과 만해마을에서 만난 문인들은 그이의 외도가 거슬렸다. 한 문인은 “자기 것인 음악이나 열심히 하지 왜 남의 마당인 문학판을 기웃거리냐”며 그에게 욕심쟁이라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단다.

그러나 이강숙 선생은 평생 음악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음악은 모든 사람의 것이고, 문학도 마찬가지다. 세상 모든 공부가 그렇고 예술 또한 그러하다. 그에게 문학은 허영이 아니라 철저히 “삶의 방식”일 뿐이다. 문학을 읽고 쓰고 공부하는 것, 그것은 음악을 공부한 이에게 일종의 벽을 허무는 작업으로, 오래 전부터 그는 크로스오버를 실천해온 셈이다.

하물며 신학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뛰어난 신학을 공부했어도, 신학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마음에 믿음이 없으면 그것은 헛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신학자들이 신학을 자기 것이라고 포기할 수 있을 때, 학문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삶의 방식으로 신학의 작동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분이 어려운 신학 용어가 아니라 철저히 삶으로 낮고 천한 인간들과 더불어 사셨기 때문이다.

문학이 작가들의 전유물이 아닌 것처럼 신학도 신학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문학이 모든 사람이 읽고 공감해야 하는 그 무엇인 것처럼, 신학도 모든 사람이 삶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그들의 역할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작가들이 삶의 양식을 이야기로 풀어내 보여주는 안내자인 것처럼, 신학자도 신학을 삶으로 풀어내 보여주는 안내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강숙 선생은 복음서를 즐겨 읽는다. 그가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감동하는 이유는, 그것이 신학적 지식을 선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 마음의 정곡을 찌르기 때문이다. 정교한 틀로 매겨진 신학이 아니라, 복음은 가슴을 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데 사랑학이라는 학문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복음은 복음으로써 명쾌해서 좋아요.”

그렇게 예수의 삶의 방식을 배워가는 것이다. 좋아하는 대상을 잘 알고 싶고, 잘 하고 싶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배워간다. 문학도 배워가는 것이다. 그것은 내 것과 네 것에 울타리는 친 벽 허물기이면서 사회적 통념을 깨는 작업이기도 하다.

 

피벗 코드, 진정한 개혁의 의미

이강숙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피벗 코드(pivot chord)를 이야기한다. 음악에서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조(調)를 동시에 표현하는 코드가 바로 피벗 코드이다. 하나의 조에서 그것과 다른 조로 탈바꿈 하려면 애매성을 지닌 피벗 코드가 필요하다. 하나의 어떤 상태에서 전혀 다른 어떤 상태로 전환하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가 더 발전된 상태로 전환되려면, 진보와 보수를 연결하는 피벗 코드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서로 다른 두 개의 처지, 입장, 이념을 동시에 표명하고 있는 피벗 코드, 선회축의 개입이 필요하죠. 그래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통제를 주장하는 사람과 자율을 주장하는 사람, 개체주의를 주장하는 사람과 전체주의를 주자하는 사람, 등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회전축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라의 품격은 높아질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피벗 코드의 역할이 바로 여기 있어요. 멘탈리티의 변형이 회색분자가 아니라 차원 높은 의식이 집단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매거진 주간한국> 이어령·이강숙 특별대담 “피벗 코드 사회, 국가 품격을 높이는 길” 중에서).

보수와 진보, 여야, 빈부, 유무식의 대결, 남과 북, 동과 서의 사이에 그들을 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이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보수 마음속에 진보가 있고, 진보 속에 보수가 있는 세상이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을 완성한 사회이다.

사회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는 요즘 새로운 작품을 쓰고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글이 풀리지 않는단다. 그래도 조바심치지 않는다. 누군가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고 하지만, 그에게 있어 소설은 항상 떠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발표한 소설마다 부끄럽고, 그래서 “날 믿고 온 소설에 미안하더라”는 말에서 세상사를 겸손함으로 채우겠다는 강단이 보인다. 지금 그는 떠난 소설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다.

젊은 시절, 등단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40년 넘게 문학에 목말라 했지만, 남들은 무언가를 정리한다는 나이에 등단했지만,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단다. 내 스스로 치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고, 그것으로 인간의 필요를 찾아 끝까지 헤맬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70이 넘은 지금도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형언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살려고 항상 노력합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말이죠. 아무리 숭고한 것이라도 그것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고,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산다면 그것은 인간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강숙 선생은 자신을 일러 유치하단다. 그러나 유치한 걸 유치하다고 말하는 것만큼 유치하지 않은 일이 있을까. 그의 말처럼 유치한 것을 숨기기 위해 폼 잡는 것이 더 유치한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유치하지만 거기에 진실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래서 이강숙은 정보의 범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유치하지만 옳다고 해줘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거기서 진실을 찾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일상다반사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책으로 더 깊이 침잠한다. 그곳에 사회를 읽는 눈이 있고 길이 있기 때문이다.

 

글_장동석 | 사진_류정호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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