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나의 마음은 무척 쓸쓸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아주 편안하다. 사랑도 없고 증오도 없다. 기쁨도 슬픔도 없다. 소리도 색도 없다.
나이가 든 때문일까. 내 머리가 벌써 희끗희끗한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내 손이 떨리는 것도 분명한 사실 아닌가. 그러고 보면
내 영혼의 손도 떨리고 있고, 머리도 이미 반백이다.
이것은 벌써 여러 해 전부터의 일이다.
그 이전, 내 마음은 피비린내 나는 노랫소리로 가득하였다. 피와 강철, 불꽃과 독, 원상복귀와 복수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
자기 모든 것이 공허해졌다. 가끔, 어쩔 수 없이 자기기만적이기 마련인, 희망이란 것으로 이 공허를 메우려고도 하였었다. 희망, 희망……, 나는 이 희망을 방패삼아 암흑의 밤의 습격을 막아보려고도 하였다. 설령 방패의 안쪽 역시 공허 속의 암흑의 밤일지라도. 이런 속에서 나의 청춘은 서서히 소진되어 갔다.
나의 청춘이 이미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나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몸 밖에는 당연히 청춘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별, 달빛, 죽어가는 나비, 어둠 속의 꽃, 부엉이의 처연한 소리, 각혈하는 두견새, 웃음의 아득함, 사랑의 춤 등등. 슬프고 아득한 청춘일망정 청춘은 그래도 청춘이다.
그러나 지금은 왜 이리 적막할까? 몸 밖의 청춘도 다 사라져 버렸고, 세상의 청년들도 다 늙어 버린 것일까?
나는 홀로 이 공허 속의 암흑의 밤과 싸워야 한다. 나는 희망이라는 방패를 버리고, 페퇴피 샹돌(Petofi Sandor 1823-49:헝가리 시인)
의 <희망>의 노래를 듣는다.
희망이란 무엇이더냐? 탕녀로다.
그녀는 아무에게나 웃음을 팔고 모든 것을 바친다.
그대가 고귀한 보물 ㅡ 그대의 청춘을
바쳤을 때
그녀는 그대를 버린다.
위대한 서정 시인이자 헝가리의 애국자였던 그가 조국을 위하여 코사크 병사의 창에 죽은 지 어느덧 75년이 지났다. 죽음은 슬프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그의 시가 지금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슬픈 인생이여! 저 걸출한 영웅 페퇴피도 어두운 밤 앞에 걸음을 멈추고 아득한 동방의 나라를 되돌아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
내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이 허망 속에서 목숨을 부지해 갈 수 있다면, 설령 그것이 내 몸 밖에 있다 할지라도 나는 지나간 나의 슬
프고 아득한 내 청춘을 찾아내리라. 몸 밖의 청춘이 소멸되면 내 몸 안의 황혼도 이내 스러질 것이기에.
그러나 지금은 별도 없고, 달도 없다. 죽어가는 나비도, 웃음의 아득함도, 사랑의 춤도 없다. 그런데도 청년들은 편안해 한다!
나는 홀로 이 공허 속의 암흑의 밤과 싸워야 한다. 설령 내 몸 밖에 있는 청춘을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내 몸 안의 황혼만큼은 스스로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암흑의 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별도 없고 달도 없다. 웃음의 아득함도, 사랑의 춤도 없다. 청년들은 편안하다. 그리고
내 앞에는 진정한 암흑의 밤조차 없다.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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