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메모/느리게 흐르는 강 中

57 노을 속을 걷다

karmaflowing 2009. 8. 29. 02:48

이정을 위로하는 말이 결코 아니기에 이정이 그 말이 맞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 그녀에게 섭섭하기도 했다.

악현상이 그런데 노을이 지는 여름 서편 하늘에 시선이 가며 다시 말했다.

 

"그러나 하늘에는 충만한 복이 있고 복은 그 그릇의 모양이 아닌 크기대로 받으니 당신이 그 질그릇을 깨끗하게 닦으면서도 한편 하늘의 그릇을 닮아 더욱 크게 만드세요.

그러면 그 그릇에 충만한 복으로 그들에게 언젠가 베풀 날이 있을 것이에요. 그들이 가장 어려울 시점에 도와 인정을 받을 기회가 반드시 있을 것이에요. 중요한 것은 그릇의 모양이 아니죠."

 

그녀가 정사대전에서 곧 닥쳐올 암운을 예상하는 것이고 이정의 활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늘의 그릇이란, 크고 웅대하며 거세고 세차면서도 유유하고 장구한 것이다.

호방하고 넓은 기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담는 그릇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며 자연과 함께 만드는 그릇이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복은 본래 똑같다.

다만 받는 자신의 복의 그릇만큼밖에 받지 못하고 나머지는 흘러 넘치게 된다.

그러기에 하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그릇을 키워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복이 있어도 그만큼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릇을 키우려면 작은 소원이 아닌 큰 소원으 빌어야 하며,

큰 소원이란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것이며, 또한 올바른 소원이어야 한다.

 

이정이 걸어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악현상의 옆모습을 놀라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 얼굴이 흉터에도 불구하고 저녁 노을 빛을 받아 광휘로 빛나고 있었다.

노을을 마주보면 땅의 끝을 걸어오는 어스름이 보인다.

노을을 따라 죽음으로 걸어가는 소녀는 모든 세상 이치를 알고 있으나 정녕 자신의 숙명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끝없는 저녁노을 속으로 걸어가고 이정은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