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뜨린 검 손잡이에 달린 붉은 수실이 핏물을 머금었다.
생명이 붉은 꽃잎처럼 빗물 속에 낙화되며 짓밟혓다.
이정이 이번 싸움에서 얼마의 목숨을 빼앗았는지 모른다.
부지불식간에 무의식중에 한 금의인이 그 앞에 나타났다.
금의인이 웃었다.
이정이 물었다.
"당신은 누군가요?"
금의인이 말했다.
"너는 나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먼 옛날부터 너와 함께 존재했다.
나는 손님과 같이 왔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곤 한다. 그런데 나는 천년이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너는 나를 알 것이다. 나는 시간을 검에 넣은 것이니 곧 나를 일컫는 것이다."
"아! 당신은 무상검!"
이정이 천하제일검 한선생이 무상검에 대해 일컫는 것을 떠올렸다.
세상 무엇보다 굳세어 만년한철을 녹슬게 하고 산을 허물어뜨리고 정정한 낙락장송을 쓰러뜨리는 시간의 힘이 깃들인 검이었다.
무상검이 말했다.
"네게 대적할 수 없는 무상의 힘을 부여하니 신위를 드러내어 적을 모두 죽이도록 해라.:
이정이 검을 떨치니 어느 순간부터 무상의 웅대하며 기이한 기운이 검에 실렷다.
우우웅!
그리고 그가 검을 떨칠 때마다 적이 추풍낙엽같이 패퇴했다.
단지 검기에 베어지는 것만으로 사지가 잘려나갔고 검풍에 닿는 육신은 궤멸되었다.
우르릉! 쾅!
어느새 그가 장의경을 보호하며 선두에 서 있었다.
이정의 앞을 막던 적들뿐만 아니라 아군인 남궁세가와 십대속가의 모든 남은 이들이 이정의 신위에 경악하며, 또한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만큼 그에 대한 믿음과 힘을 얻었다.
금의인의 목소리가 이정의 머릿속을 왕왕댔다.
"나는 오래전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 너는 은의 관리인 이징의 아들로 태어나 향후 세 아들을 두었으니 계속 천년을 그 피를 이어온 것이다.
천년 전 주와 은의 이곳 패원고원 전투에서 너는 이정이라는 이름으로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때 너는 무수한 자들을 죽였다.
탁탑천왕 이정, 그때 너는 나와 함께 있었다. 네가 메고 다니며 적을 압사시키던 황금보탑이 곧 나의 현신이었으며 그 이름은 두려운 전설이 되어 천 년을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금의인의 말이 이어졌다.
"너는 온유한 성품으로 평생 수많은 화초를 돌보고 키워왔다.
그런데 비밀의 정원에서 네 자신의 대공을 위해 불과 하루 사이 그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나 또한 오직 목적만이 존재하니 무상검은 곧 무정검이다."
그 말에 이정이 괴로워했다.
"당신은 잔인하군요. 당신은 검의 끝인가요?"
금의인이 신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위에 단 하나 검이 있으니 이는 천검이라 부른다.
그러나 천검의 실체는 누구도 모르며 천검은 검이되 또한 검이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과거 이를 얻은 자가 없었으며 향후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정이 말했다.
"나는 우리를 위해 뒤에 홀로 남아 인간으로서는 죽이지 못한다는 자를 지금 대적하고 있는 한 여인을 알고 있소.
그리고 그녀가 반드시 그 자를 이기고 이곳으로 올 것을 믿고 있소.
세상에 절대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하오."
"하하, 무엇보다 네가 나를 이기지 못하고는 천검에 대해 알 수조차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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