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평이 그녀들의 죽음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자신의 무기력함이 겹쳐지면 극도로 분노했고 노해 외쳤다.
"이놈!"
어쩜 자기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그러나 검을 잡은 손은 평소의 반에 반의 진력만이 느껴질 뿐이고
산등성이 지는 달을 등진 적의 모습은 더욱 거대했다.
그가 자신의 능력의 부족함을 느낄수록 분노가 증오로 변했다.
어느 겨울 하루 사부는 장평에게 말했다.
"분노는 거룩할 수 있으나 약자가 느끼는 분노는 증오이다.
증오는 몇 사람을 죽일 수 있으나 사랑은 만명을 구원하는 것이다."
어릴 적 겨울 온 산에 눈이 쌓인 밤 등잔불 아래에서
무서운 옛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던 사부가 갑자기 꺼낸
증오라는 낯선 어휘에 어린 장평이 의아심을 느꼈다.
"장평아, 네가 약자가 되어 증오를 느낄 기회가 언제 있겠느냐?
어쩜 네 평생에 그런 일이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장평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만일 제가 약자의 분노인 증오를 느끼면 어떻게 되나요?"
"그 때 너는 네 속의 무서운 악을 볼 것이다.
그리고 차후 그 악을 뛰어넘은 진정한 의와 선의 중요함을 알 것이다.
나는 네가 그 일을 겪어야 한다면 아무쪼록 일찍 겪고 또 뛰어 넘길 믿는다.
그리고 그 순간이 힘든다면 사부의 지금 한 말을 명심해라."
장평이 지금 의식이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말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비록 만강교는 악했으나 그 중 흑의소녀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군자였다.
비록 무림맹은 선했으나 눈앞의 백승마창은 악했다.
"선이 약하더라도 분노하면 증오가 되고,
이러한 증오가 여러 개 모이면 악을 능히 이길 힘을 가지게 되나
다시 그 자체로 거대한 악이 된다."
사부가 마지막으로 한 경계의 말과 평소답지 않던 준엄한 눈빛은 뇌리를 스치는데
그의 감정은 오히려 격앙되며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냉막함과 노여움이 눈빛이 가득했다.
증오!
그리고 살기!
그가 지금껏 그 자신이 그런 살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여 본 적이 없는 짙은 살기였다.
장평의 눈빛에 혈광이 돌며 그의 차디찬 검이 백승마창을 노렸다.
그 모습이 오로지 복수와 명분에 내일을 기약 없는 삶을 살아가는
무림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사부가 가장 경계한,
아무리 먹어도 결코 배부름을 못 느끼는 아귀와 피를 그리는 야차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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