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메모/공산만강 中

90 인생의 바다에 내리는 비

karmaflowing 2010. 10. 11. 00:51

자정이 가까운 삼경 무렵 장평이 황유정과 교대로 국주의 침상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황유정과 모친은 오늘 많이 바빴고 특히 황유정은 내일 아침 일찍 마정의 행방을 찾아야 했기에 황국주 곁에서 밤을 장평이 새우기로 했다.

장평이 늦은 밤 국주의 침상 곁 의자에 홀로 앉아 있었다.

 

부엉!

 

부엉이가 울고 밤새들이 잠을 뒤척이는지 울고 있었다.

은빛 찌르레기 새가 멀리 보이는 가시나무 둥지에서 푸드덕 날아올랐다.

서늘한 기운이 차라리 푸른 빛을 남빛으로 여기게 하는 푸른 대나무들이 바람에 울고 있었다.

창가의 키 큰 계수나무가 가는 봄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밤은 달과 같이 있어 외롭지 않고 바람은 가지를 흔들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고 꽃이 보아주는 이 없어도 스스로의 외로움을 달래려 피어나고 있었다.

개울가 냉이꽃이 내일 새벽에 찾아올 벌과 나비를 위해 개울물에 비친 모습을 치장하고 있었다.

 

우!

 

어느집 개가 울고 있었다.

사람을 보고 짖던 겁많던 개가 이제 달을 보고 짖고 있었다.

늦봄의 밤은 풍부하면서 외로움의 가시를 지니고 있었다.

황국주의 병실은 유등의 심지를 낮추어 밝기를 어둡게 했고 불빛에 드러나는 장평의 얼굴이 초췌했다.

그의 평소의 맑은 신색은 없고 남색의복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지 구겨지고 목면 붕대는 너덜해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온갖 비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가 침상 위의 의식불명의 황국주의 얼굴을 지켜보며 슬피 말했다.

 

"사형, 제 능력이 부족하여 이렇게 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사형인 국주는 장평의 사부가 무림에 연을 이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황국주가 사부의 먼 친척이 되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젊은 시절 장평의 사부에게 공산에서 사사를 했고 그 선연이 다시 장평에게 이어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장평이 아는 유일한 어른인 그 분이 지금 세상을 버리려고 했다.

이 밤이 되고 새벽이 오고 다시 저녁이 되면 국주는 영원히 세상을 뜰 것이다.

장평이 그 생각에 울먹였다.

 

'흑!'

 

그가 침상위 국주의 흉측해진 손을 꼭 쥐었다.

비록 사부는 죽음 또한 자연의 일부라고 말했으나 그의 심정은 국주가 다시 건강하고 밝은 모습을 회복하여 그의 이름을 평소와 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불러주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뒤로 희미하나마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신비한 검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일찍이 그가 월락성에서 무림십대기인 중 일인인 백승마창과 대적할 때 자신도 모르게 생겨났던 바로 그 검이었다.

 

무상검!

 

장평이 갑자기 주위가 대낮같이 환하게 밝아진다 생각했다.

그리고 눈앞에는 거대한 검이 나타나더니 검이 다시 하나의 금빛 인영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

장평이 생각하길 그가 아직 부상에서 회복 못하고 연일 밤을 새며 국주를 간호하며 번민한 끝에 어떤 환영을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환영은 너무나 현실처럼 뚜렷하여 검의 현상은 인영으로 화하고 인영은 다시 금의 무복을 입은 장년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화려한 금의와 넓은 요대와 금관을 쓴 그 장년인은 위엄이 저절로 넘치는 가운데 현자의 현명한 모습을 동시에 띄고 있었다.

장평이 갑자기 나타난 금의인의 기도와 만인지상의 위엄에 놀라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고 생각했으나, 실제 그의 몸은 의자에 그대로 앉은 자세에서 국주의 손을 쥔 채 침상에 엎드린 채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했다.

장평이 꿈인지 현실인지의 경계에 있었다.

그때 금의인이 장평을 향해 낭랑한 어조로 물었다.

 

"너는 왜 번민하고 있느냐?"

 

장평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사형의 목숨이 내일 해가 지면 세상을 떠난다 하기에 마음이 찢어지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슬픕니다."

 

금의인이 침상 위의 황국주를 돌아보고는 장평을 향해 말했다.

 

"그는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한다. 그의 몸에 네가 아는 슬픔이 남아 있는가? 그의 몸은 단지 먼지로 돌아갈 뼈와 살로 만들어진 육신에 불과하고 슬픔은 있지 않다. 그렇다면 슬픔은 네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네 슬픔은 네가 자연에 온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삶과 죽음이 자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금의인이 그리고 갑자기 노래를 낭송했다.

 

"일월서의 세불아연 日月逝矣 歲不我延

오호노의 시수지건 嗚呼老矣 是誰之愆

 

세월은 흐르나니, 날 위해 멈추지 않나니

아! 늙었도다.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금의인이 노래를 멈추더니 장평에게 다시 물었다.

 

"인간이 늙고 죽는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이며 누구의 허물 때문인가?"

 

'과연 사람의 생로병사가 무엇 때문이며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

 

장평이 생각할수록 대답을 하지 못하게 되자 금의인이 또 다른 문구를 읊조렸다.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물질이 색(色)과 정신인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를 쌓는(蘊) 것이며, 오온은 삼라만상 세상만사를 의미하니, 곧 인생무상을 의미하는 바이다. 설니홍조(雪泥鴻爪)라! 눈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은 눈이 녹으면 없어지니 인생의 자취가 눈 녹듯이 무상하도다!"

 

듣고 있던 장평이 깊은 사색 끝에 그의 의지를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금의인의 두 눈에 정광이 어리더니 침상 위의 국주를 다시 내려댜보았다.

그리고는 장평을 향해 엄숙히 말했다.

 

"이 자의 몸에 누가 천상의 영력으로 하늘의 선천지기가 통하는 길을 만들었다. 더구나 그 몸 안에는 젊은 시절 공산에서 얻은 선천지기를 형성하는 그릇이 본래부터 있다. 내가 다시 무상의 기운을 더하나니, 무상의 기운은 그의 몸 속의 기준 조직과 이미 변해버린 조직을 서서히 하나로 일치할 것이니 그는 죽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길을 통해 선천지기가 넘나들며 때가되면 그릇을 채우니 한 호흡만으로 그는 살 것이다. 그리고 한 달인지 일 년이 될지 모르나 어느 순간 그는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 자의 몸에 스며든 마기는 죽음과 창조의 기운을 동시에 가진 근원에서 형성된 것이니 그 원인인 마정만이 그를 당장에라도 일으켜 두 발로 서게 할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그 원인인 마정을 먼저 얻으라!"

 

말을 끝낸 금의인이 갑자기 검의 형상을 띈 채 국주의 몸을 베어갔다.

황금빛 검기가 온 방 안을 뒤덮으며 찬란했다.

그 광휘에 부신 눈을 손으로 가리며 장평이 놀라 소리쳤다.

 

"멈추시오!"

 

장평이 놀라 외쳤으나 금의인은 어느새 처음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거대하고 찬란하고 투명한 검이 금의인과 같이 서 있었으며 검이 금의인인지 금의인이 검인지 구분이 모호했다.

그런데 유등불빛 아래 드러나느 실제 병실 안의 정경은 장평이 여전히 의자에 앉아 국주의 손을 쥔 채 침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쥔 손에서 황금빛이 감돌며 기이한 기운이 그와 국주의 몸을 동시에 휘감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금의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나를 알 것이다. 나를 이전에 만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장평이 커다란 검을, 검과 한 몸으로 겹쳐 있는 금의인을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무의식은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무상검! 먼 여행을 떠난 손님! 당신은 검이며 검은 당신 자체입니다."

 

"그렇다.

내가 무상검이니 너는 나를 배워라!

항상 정결하며 노력하라.

손님은 언제 올지 모르니 신기독야(愼其獨也)라, 혼자 있어도 항상 경계하고 깨어 있으라!

향후 거짓을 말하는 자가 너를 속이되 인생은 슬픔만이 있다 할 것이나 인생의 바다에는 본래 슬픔의 비가 내리고 바다에 닿으면 흔적이 없으니 슬픔 역시 무상의 바다에서 소멸하리라.

향후 거짓을 일삼는 자가 너를 속이되 사랑도 식으리라 말하리라. 그러나 진실된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참아내며 모든 것을 견뎌내도록 한다."

 

장평이 이제까지 과도한 심력을 쓴 탓인지 기력이 탈진하여 그만 '쿵' 하고 그 자리에 넘어졌다.

그리고 벽이 기댄 채 의식을 잃었다.

현실 속의 그 역시 기력이 탈진된 채 혼수상태에 빠졌다.

얼굴이 하얘졌고 몸은 떨고 있었으나 병실 안은 조용하고 깊은 밤의 정적만이 새벽의 여명을 향해 고요히 몰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