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예상한 바이지만 참으로 천무련주라는 자는 무서운 자였다.
그러나 이 고비를 넘기면 그녀 역시 오랜 세월 안배한 것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눈앞의 그녀의 생명을 조여오는 탑림은 그녀도 미리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녀의 정신이 몸 이전에 먼저 망가지는 것이다.
악현상의 희미해지는 머릿속에 병든 사부의 초췌한 얼굴이 떠오르며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때 절망속에서 어렴풋이 청아하며 부드러운 여인의 말이 들려왔다.
"상아, 지금 매화가지를 잘라도 꽃은 없는 것이다."
...(중략)...
"내 사랑스런 상아! 지금 매화가지를 꺾어도 가지속에 매화는 없단다."
늦가을이라 매림에는 매화꽃이 피어나 있지 않았다.
"상아, 매화란 본시 마음속에 피어나는 것이다."
의아해하는 악현상을 향해 모친이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그때 세상에는 꽃 하나 없고 칼날같은 추위만이 너를 에워싸고 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네 마음속 화원에 있는 매화나무에는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단다"
악현상이 어느 순간 검을 바로잡고서 두 눈을 감았다.
마음깊이에서부터의 울림에 따라 경구를 되뇌이고 있었다.
"매화나무 속에는 매화가 없다."
모친의 정겨운 음성이 멀어지고 있었다.
"결코 고통이 없이는 매화는 피어나지 않는단다. 세상의 모든 나무는 여린 살 속에 딱딱한 아픈 옹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질곡의 땅위에 세파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꽃은 없단다. 제철이 아닌 매화나무 속에는 당장 칼로 잘라보아도 꽃이 없단다.
매화꽃을 보기 위해서는 정성을 다해 나무를 잘 가꿔야만 한단다."
악현상의 감은 두 눈 사이로 맑은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가 자란 해변가의 매림이 있는 친척집을 어린 나이에 사부의 엄한 손을 잡고 멀리 떠나올 때,
샘가의 오동나무의 잎새는 저무는 가을을 노래하고 있었고 무채색 하늘에는 남쪽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슬펐다.
정원에는 감나무의 붉고 누런 잎새가 바랜 풀밭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감나무에는 까치게 먹게 하나 남겨둔 작은 감이 오후 하늘을 붉게 채색하고 잇었다.
그 무채색 하늘의 빈공간에 어린 악현상이 눈물 속에서도 웃고 있었다.
이제 악현상의 마음과 검에서 생명의 매화가 새로 피어났다.
그녀의 마음을 그동안 괴롭혔던 천인혈의 어두운 악업이 새로운 생명의 기운으로 승화되며 발휘되는 것이다.
태초의 황야에 강을 열고 언 땅을 녹이며 혼돈에 생명을 탄생시키는 천지창조의 위대한 기운이었다.
고금십대무공 중 하나인 무적검법의 최후초식이 반혼지경의 그녀의 손에 의해 다함이 없는 천인혈의 공력을 바탕으로 일순 발휘되었다.
무중유생!
그녀의 손에서 초식이 쏟아지며 낭랑한 외침들이 같이 메아리쳤다.
"믿음은 탑을 세우는 것 이전에 허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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