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그 시간 의식을 잃고 있는 이정의 꿈속이었다.
무상검을 펼친 여파인지 위급한 상황에서도 깊은 꿈속에 빠져든 것이다.
이정이 천 년 전의 탁탑천왕 이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50대 정도의 장년의 나이에 단호하고 각진 외모와 영기 있는 눈빛이었고, 전설과 달리 커다란 보탑은 지니지 않고, 대신 넓은 요대를 허리에 두르고 큰 패검을 찬 건장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눈빛과 이목구비는 현재의 이정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이정이 주나라의 붉은 의복의 무장 차림으로 모처럼 가을 산을 홀로 오르고 있었다.
산 중턱을 지나 높이 올라오니 폐망한 은나라의 영역이 멀리 내려다 보였으니 곧 패원고원 내의 은주의 큰 전쟁이 벌어졌던 구산오강이었다.
푸른 강은 굽이 흐르고 절벽가 원숭이의 울음소리가 구슬펐고 가을바람이 소슬피 불어왔다.
탁탑천왕 이정이 얼마 전 끝난 주나라와 은나라의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죄스러워 했다.
그가 한동안 망연히 바위 위에 서 있다가 하산하였다.
그런데 하산 때 그가 평소 가던 길과 다른 길을 택하다가 길을 잘못 들게 되었다.
걸음을 바삐하여 조금 더 내려가니 얼핏 양지곁에 울타리가 쳐진 대나무 소축이 보였다.
얼핏 스쳐지나갈만도 한데 그가 그 소축을 발견하고는 잠시 들러가기로 했다.
마침 소축 내에는 사람이 머물고 있어 한 머리가 흰 신선과 같은 풍모의 백의노인이 수발드는 아이로 보이는 어린 청의 동자와 함께 대청 화로곁 나무 의자에 앉아 간혹 웃기도 하며 말을 나누고 있었다.
한 곁에는 두터운 서적이 펴진 채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실례지만 산에서 내려오다 길을 잃었소. 잠시 쉬었다 가도 되오?"
이정이 두 노소의 재미있는 대화를 방해할까 조심하며 물으니
노인이 이정을 신비한 눈빛으로 보더니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하시오. 나중 저쪽 소나무 숲을 돌아가면 내려가는 하산길과 만나게 되오. 그리고 먹을 물은 샘결 나무통에 길어둔 것이 있으니 마셔도 되오"
전쟁이 막 끝난지라 혼자 돌아다니는 패잔병 같은 무인들을 경계할 만한데 기이하게 경계심이 없었다.
청의동자 또한 표주박에 물을 떠서는 그에게 공손하게 건네주었다.
그가 물을 마시며 둘러보니 소축 한쪽 담벽가에 하나의 방치된 반석이 보였고 반석 위에는 파여져 물이 고이고 이끼가 끼어있으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무심코 읽은 그 글은 특이한 내용이었다.
'천심자 득천검(天心者 得天劍)'
그가 그 문구가 이상혀 물었다.
"노인장, 천심자 득천검이라 하니, 천검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바이오?"
"허허, 그대가 저 천검과 인연이 되어 이목에 띄었구려. 천검은 말 그래도 하늘의 검을 의미하오."
이정이 곤혹스러워 했다.
"내가 많은 이름난 명검에 대해 들었으나, 하늘의 검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오. 하늘의 검은 또 무엇을 말하오?"
노인이 그의 행색을 한참 살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오직 진리만을 찾아 무상의 인연을 겪고, 천 년의 세월을 돌아서 여기 다시 찾아 올 수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검이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얻기가 가히 불가능한 검이오."
이정이 노인의 말에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잠시 생각하더니 탄식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참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소.
그것 또한 억지 같지만 정녕 무상의 악연이라면 악연일 것이오.
그리고 대의라는 명분 아래 셋째 아들 편에 서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모국인 은나라를 멸망시켰소.
세상이 참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내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마치 콩깍지로 가마솥에 든 콩을 삶는 골육상쟁의 죄악을 영원히 되풀이할 것이오.
곧 천년의 세월을 되돌아서 여기 10만의 목숨이 죽어 간 구산오강에 다시 와서 또 그런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오.
노인장, 사실 나는 과연 무엇이 진리인지 요즘 고민을 많이 하고 있소. 꿈속에서조차도 내가 가야할 바를 번민하며 찾고 있소. 마치 물 속에서조차도 갈증하고 목말라 하는 것이오."
이정이 말하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자신은 이 노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이런 마음속 말까지 하는가?
노인의 예사롭지 않은 언행과 속세같지 않은 주위풍광의 현현한 분위기 때문인가?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물고기는 물에 살면서도 물을 모르고, 사람은 진리 속에 살면서도 평생 진리를 모른다 했소. 소축 뒤를 따라 걸어가면 봉분도 없는 곳에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을 것이오. 평생 천검을 찾다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자의 비석이오. 육신은 비록 화장하여 없어졌으나 그가 후인을 위해 비석에 평생 얻은 심득을 남긴 것이오."
그가 노인의 안내를 따라 같이 걸으니 송림을 뒤로 하고 양지곁에 커다란 비석이 하나 홀로 서 있었다.
세월의 풍상을 그대로 맞고 서 있는 비석은 보는 것만으로 비감이 들었고, 더욱이 노인 비석의 넝쿨을 걷어내니 비석 전면에는 음각으로 화폭이 조각이 되어 있었다.
기이하게도 화폭은 인간세상의 삼라만상을 나타내며, 더욱이 온갖 고뇌의 장면이 깃들어 있었다.
사형수가 밧줄에 목이 매달리는 장면, 싸움터에서 가슴에 창이 꽂혀 고통해하며 피를 흘리는 장면, 그리고 죽고 병들어 고통해 하며 울부짖는 말 그대로 고통의 그림이었다.
간혹 젊은 정원지기 청년이 전지가위를 든 채 곤혹스런 표정으로 잔뜩 찌푸린 하늘을 쳐다보는 장면도 있었고, 한 문사가 여인을 닮은 산정에서 바람을 맞으며 번뇌 속에서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있었다.
이정이 의아해 하며 표정이 굳어지자 노인이 설명했다.
"현세고뇌도이오! 이는 속세를 떠난 산과 동굴로 숨어든 천기를 아는 현인들만이 알고 있고 그들 사이에 비전되는 그림이오.
그보다 좌측 상단의 두 줄의 글을 읽어보시오. 이 비석이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하오."
비석 좌측 상단에는 두 줄의 글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전지전능한 하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보고만 있다."
이정이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사실이었다.
만일 하늘이 정의롭다면 왜 세상의 불의를 보고만 있는가?
이곳 구산오강만 해도 벌써 십만 이상의 생명이 목숨을 잃어 원혼으로 떠도는데 어찌 수수방관 보고만 있었는가!
그의 마음이 심란해지며 하늘에 대한 원망이 커졌다.
그가 평소 느꼈던 하늘에 대한 불공정과 무관심함에 대한 의문과 불만이 그대로 다가오는 것이다.
"과연 하늘은 알면서 왜 보고만 있는가...! 왜 불의한 자를 징계하고 의인을 도와주지 않는가? 왜 가련하고 약한 자를 보살피지 않고 보고만 있는가"
이정이 혼잣말로 자신도 모르게 그 의문을 토로하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자세히 보시오. 두 문장 뒤에 한 칸이 비어져 있소"
이정이 보니 한 문장을 더 적을 수 있게 빈 여백이 남아 있었다.
이정이 궁금하여 황급히 물었다.
"노인장, 마지막 문장의 내용도 알 수 있소?"
"노부도 알지 못하오. 사실 그 남은 문장이 천심의 해답이오. 그리고 천심의 해답을 아는 곳이 곧, 천검을 얻는 것이오."
노인이 의미 있는 말을 했다.
"천년의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른 뒤, 현세고뇌도 그림 속의 모든 삶을 차례로 겪고 난 뒤, 그대는 비로소 무상의 경지를 알게 될 것이오. 그때가 무인이면 검으로, 문인이면 글로서, 상인이면 장사 속에서 어느 한 순간 무상이 형태를 갖추어 찾아올 것이오.
그리고 같은 때에 비석의 마지막 셋째 문장을 알려줄 운명의 인물을 만날 것이오. 단지 그 삶에게서 그 답을 얻는 것은 그대의 능력과 운에 달렸소. 알지 못하고 지나칠지, 아니면 그 해답을 얻을지가 그때 결정될 것이오. 단지 그 기회는 정말 찰나이며 잘못 한 순간의 실수로 그 기회를 놓치게 되면 영원히 알지 않을 것이오. 두 번의 기회는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이오.
전설의 탁탑천왕 이정이 부활하여 세울 새로운 하늘과 땅, 곧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새로운 하늘과 땅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이고 세상 역시 피폐할 것이오. 그러니 항상 깨어있고 지혜로워야 할 것이오. 천년 동안을 변함없이 주일무적상성성(主一無敵常惺惺), 항상 깨어 있고 의롭고 지혜로와야 할 것이니 정말 인간의 몸과 정신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오."
백의노인이 정녕 안타까와 하더니 말끝이 희미해지며, 소축과 노인 그리고 티 없이 웃고 있는 동자의 정경이 갑자기 산등성이에서부터 피어나는 구름 속에 묻히며 한폭의 산수화 같이 희미해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이정의 의식이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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